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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1여성이변해야한국이산다]"남편 돈이 내 돈" 안방마님에 安住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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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친구들 만나 운동하고, 쇼핑하고, 영화 보면서 시간을 보내던 생활에 익숙해져서 막상 일 제의가 와도 시큰둥해요."

아이들이 다 커서 엄마 손길이 덜 필요해졌다는 金모(37·서울 방이동)씨는 최근 한 백화점에서 고객관리센터 상담직을 제의받았지만 큰 고민 없이 거절했다.

결혼 초기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 몸이 달았던 정모(36·성남 분당)씨도 "주부로 시간을 보낼수록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전업주부로 사는 게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점점 만족하게 된다"고 말한다.

주부들의 재취업을 막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스스로 택하는 여성들이 많다.

이처럼 가정에 안주하겠다는 의식은 특히 대졸 이상 고학력 여성일수록 더 두드러진다.

◇'한국의 전업주부는 아주 괜찮은 평생직업'=육아 등의 이유로 직장을 그만뒀다가 돌아갈 자리가 없어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전업주부들은 전업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한다.

힘들게 직접 돈을 벌지 않아도 한국의 관행상 온라인으로 입금되는 남편의 월급을 고스란히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용돈 규모를 정하는 것은 기본이고, 열명 중 일곱명은 이사나 주택 구입 같은 큰 일의 결정에도 참여한다. 전업주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것도 생활만족도를 높이는 큰 이유다. 돈과 시간을 모두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전업주부의 활동폭을 넓혀주고 있다.

<그림 참조>

중앙일보가 8월 중 두 차례 실시한 '한국여성의 가치관과 삶'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성 열명 중 아홉명은 '여성이 직업을 꼭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면 상당한 의식변화를 겪는 것으로 드러났다.

'남편의 사회적 성공이 곧 아내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미혼 여성은 48.3%만이 '그렇다'고 답한 반면 기혼여성은 69.7%나 같은 대답을 해 결혼생활에 안주하려는 의식을 보여줬다.

또 '남편의 수입이 충분하면 아내는 직업을 안 가져도 좋다'는 설문에도 미혼 때는 22.6%가 '그렇다'고 답했지만, 결혼 후에는 33%나 같은 대답을 했다.

◇가정에 안주하는 고학력 여성 인력=고학력 전업주부일수록 경제활동에 대한 욕구가 크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육아와 살림솜씨는 물론이고 경제적 능력이나 지적인 면에서도 취업주부보다 경쟁력이 높다고 생각한다.

金모(42·서울 잠원동)씨는 "취업주부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아실현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가정 생활이 엉망이고 사회에서도 푸대접받는 경우가 많다"면서 "전업주부는 가정의 중심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취업주부보다 정보가 더 많아 재테크도 더 잘한다"고 말한다.

朴모(52·서울 행당동)씨도 "전업주부로 30년을 살다보니 두루 아는 게 많아진다"면서 "가정관리학 박사라도 전업주부만큼 능하게 가정생활을 알지는 못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렇게 전업주부로서의 높은 만족도는 여성 고학력 인력 활용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의식의 결과로 대졸 이상 고학력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일단 한번 퇴직하면 노동시장에서 영구 퇴출되는 L자형 곡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앙일보 설문조사 결과 취업주부 가운데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주부는 31%에 불과했다. 이는 출산과 육아 때문에 20대 후반에 직장생활을 그만뒀다가 30대 후반에 다시 재개하는 전체 여성의 M자형 구조보다 더욱 후진적이다.

<그림 참조>

◇전업주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정과 사회=전업주부의 권한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돈과 시간이라는 무기를 가진 전업주부들은 부동산·교육 시장·백화점·호텔·금융권 등 사회 곳곳에서 '한국에서만 가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취업·가사노동은 노(No), 경제력은 예스(Yes)'인 현상 탓이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아파트 값 급등은 사교육 구매력이 아주 높은 이곳에 좋은 학원들이 몰린 영향이 크다. 한 학원 관계자는 "학생들보다 엄마들이 학원 정보에 훨씬 밝고 엄마들 욕구에 맞추기 바쁘다"고 전한다.

아줌마 파워가 큰 힘을 발휘하는 곳은 아파트 건설업계. 아파트 분양의 승부는 주부들의 취향을 어떻게 맞추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렇다 보니 최근 일부 아파트 건설업체는 주부들의 요구사항을 맞추느라 분양날짜를 늦추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또 전업주부들의 낮시간대 모임과 쇼핑 행태는 각 부문의 마케팅 전략까지 바꿔놓고 있다.

신라호텔 홍보팀 장우종 과장은 "실질적으로 레스토랑 점심 메뉴 대부분은 40~50대 전업주부를 위한 것"이라며 "값은 저녁메뉴보다 싸지만 아줌마들의 입소문 때문에 더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은 연간 1천5백만원 이상 구매하는 초우량 자사 카드 고객 2% 가운데 여성이 54.5%를 차지한다.

남편의 가족카드로 구매하는 전업주부는 남성으로 분류하고 있어 실제 여성 구매력은 훨씬 큰 셈이다. 한국에만 있는 백화점의 여성전용 주차장도 그 실태를 반영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우란 연구원은 "앞으로는 부부가 함께 벌지 않으면 가정 경제 수준을 원하는 수준으로 유지할 수 없다"면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고급 여성인력이 사회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성 스스로의 의식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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