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8>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 22.작곡가 이봉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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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작곡가 이봉조(1987년 작고)씨다. 이씨는 영화 주제곡인 '맨발의 청춘'을 다룰 때 잠깐 이 글에 등장한 적이 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노래로 맺어진 나와 이씨의 관계는 각별하다. 내 노래를 가장 많이 만든 작곡가가 바로 이씨다. 1960년대 나와 한때 이씨의 부인이었던 현미, 그리고 후배 가수 정훈희 등은 '이봉조 사단'으로 불렸다. 그의 노래를 많이 부른 가수들이라는 의미다.

'맨발의 청춘' 이후 60년대 중반 무렵 내가 부른 이씨의 노래로는 '잃어버린 태양' '뜨거운 침묵' '위를 보고 걷자' 등이 꼽힌다. 좀 뒤에 나온 '종점' '팔도강산' '미스터 곰'도 그의 작품이다.

"밤마다 꿈마다 외로운 그림자에/그늘진 사나이 한 많은 내 청춘이/비 오는 밤거리 가로등도 구슬퍼/알뜰한 사랑 그 입술에 죽어도 보고 싶어 죽어도 안고 싶어/목 놓아 부르며 나 먼저 가노라."

서윤성이 노랫말을 지은 '잃어버린 태양'은 영화 주제곡이다. '맨발의 청춘' 조감독이었던 고영남 감독의 데뷔작이다. 영화 내용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제법 비장미가 넘치는 노래였다. 뒤에 나온 유호 작사의 익살스러운 노래 '위를 보고 걷자'와 뚜렷이 구별된다. '위를 보고 걷자'의 시작은 이랬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울었으면 그만이지/눈물이 도대체 뭐 말라죽은거냐…."

이봉조씨는 항상 쫓기듯이 노래를 만들었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뭔가를 차근차근 직조해 나가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쉬는 듯하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한순간에 폭포수처럼 그걸 쏟아내는 즉흥성이 장점이었다. 그래서 그가 작곡한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의 주제곡 대부분은 '초치기'의 산물이었다.

심영식 작사의 '뜨거운 침묵'도 예외가 아니었다.어느 사형수의 이야기인데, 드라마 시작을 겨우 며칠 앞둔 시점에서 녹음을 끝낸 것으로 기억한다. 가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워낙 작곡 능력이 뛰어나 그 정도의 기다림은 오히려 영광이었다.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싫어서도 아니고 미워서도 아니다/너무나 너무나 벅찬 당신이기에."

이 '뜨거운 침묵'은 나중에 나온 '하숙생'과 같은 비긴 템포로,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전주(前奏)가 일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처럼 다양한 노래가 나오다 보니, 나는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극장 공연에서 같은 키의 노래, 즉 '뜨거운 침묵'과 '빛과 그리고 그림자'를 붙여서 노래하는 등 최대한으로 상승효과를 내려고 노력했다.

이봉조씨는 원래 한양대 공대 출신의 건축기사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동대문운동장과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의 공사장을 누볐다. 그러나 진주농고 재학 시절부터 독학하다시피 연마한 테너 색소폰에 대한 열망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이씨는 62년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연주자·작곡가의 인생을 시작한다. 대학 1학년 때 이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김광수 악단에서 아르바이트로 색소폰을 불던 관록이 폭발했다. 이후 이씨는 작곡가·연주자로 길옥윤씨와 쌍벽을 이루며 6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다.

내 생각에 이씨의 테너 색소폰 연주는 서구적인 스타일에 가장 가까웠다. 당시 인기있던 재즈 뮤지션인 게리 멀리건이나 스탄 게츠 등의 레퍼토리를 연주해 대단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스탄 게츠와는 70년대 초 내한공연 때 '블루룸'(현재 서울 소공동 대한항공 빌딩 지하)에서 함께 공연해 화제를 뿌렸다. 미8군 쇼에서도 그의 실력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이 무렵 이씨는 여성그룹 현시스터스의 멤버로 한 무대에 서던 현미씨를 알게 됐다.

나는 이씨를 '타고난 예인(藝人)'이라고 부른다.연주와 작곡은 물론 그림과 서예 실력 또한 수준급이었다. 그런 기질에다 카리스마까지 있어 이씨 앞에서 나는 늘 '꼼짝마라'였다. 그렇다고 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영춘씨가 주연한 코믹영화의 주제곡인 '여자가 더 좋아'가 심의에서 '저속한 가사'로 지목돼 방송금지를 당하는 등 곡절도 겪었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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