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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슈마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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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03년 5월 오스트리아 그랑프리(F1 자동차 경주)에서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36.독일)의 경주용차 페라리에 불이 붙는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타이어 교체와 연료 보충을 위해 피트(pit:정비 지역)에 들어선 페라리에 연료를 주입하려는 순간 화염이 번졌다. 슈마허가 앉아 있는 운전석에까지 불길이 널름거렸다. 연료 주입구와 멀지 않은 배기통은 800도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임에도 슈마허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사이드 미러를 통해 스태프들이 불을 끄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화염을 본 순간 슈마허의 뇌리엔 두 가지 기억이 스쳐갔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영웅 아이르톤 세나의 죽음이다. 슈마허는 열한살 되던 해 벨기에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대회에서 당대의 스타 레이서 세나를 보고 앞길을 정했다. 세나는 1994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슈마허의 앞을 달리다 시속 300km로 벽을 들이받고 숨졌다. 그는 "레이스에선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장난다" "사고는 두렵지 않다. 사고가 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멈추고 싶다"던 영웅답게 전설이 됐다. 또 하나의 기억은 같은 해 팀 동료였던 페르스타펜의 차에 불이 붙었던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연료주입 과정의 사고였다. 페르스타펜은 불꽃을 보고 운전석 밖으로 튀어나왔다.

슈마허는 불이 꺼지자마자 헬멧의 소화기 거품을 닦아내면서 슈-웅 하고 서킷(트랙)으로 돌아갔다. 피트에 머문 시간이 예정보다 두 배나 길어졌다. 그 사이 선두에 10초나 뒤졌다. 이날 슈마허는 개인 통산 67번째의 우승을 쟁취했다. 3초 차이로. 시속 300km 이상 달리는 경주에서 13초면 약 1km의 거리 차이다. 그해 슈마허는 최연소 세계 챔피언이 됐다. 지난해까지 모두 일곱 번 챔피언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우며 살아서 전설이 됐다.

슈마허의 냉정함, 혹은 차가움은 프로 승부사의 진면목으로 흔히 칭송된다. 그는 샴페인.시가로 상징되는 한량들의 호사취미 같았던 자동차 경주의 이미지를 기술.정신.체력의 스포츠로 바꿨다. 그가 쓰나미 희생자를 위해 1000만달러(약 104억원)를 쾌척했다. 서킷을 떠나서도 전설이 되려 하고 있다.

오병상 런던특파원

***[바로잡습니다] 1월 7일자 31면 분수대 기사 중

1월 7일자 31면 분수대 기사 중 10㎞는 1㎞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자동차 경주에서 통상 시속 300㎞ 내외로 달리는 경주용차가 13초에 갈 수 있는 거리는 약 1㎞인데 계산 과정의착오로 잘못 표기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