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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연쇄살인 ④ 끝나지 않은 악몽…화성 연쇄 살인 사건

중앙일보

입력

경기 화성시 주민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 이 사건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에 걸쳐 화성ㆍ수원 일대에서 일어난 10건의 미해결 성폭행 살인 사건을 가리킨다. 피해자들은 여중생부터 70대 할머니까지 연령대가 다양했으나, 대부분 손이나 스타킹 등으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맞선을 보고 돌아가던 아가씨, 야근하는 남편와 야식을 먹고 돌아오던 새댁 등이 희생됐다. 경찰은 범인상 추정(프로파일링) 기법을 통해 20, 30대에 성격ㆍ충동조절 장애가 있고 혼자 살며, 친구ㆍ동료는 거의 없는 왜소한 남성이 범인일 것이라고 지목했다. 하지만 10건의 살해 사건이 모두 공소 시효가 2005년 11월로 끝나 범인이 잡혀도 처벌할 법적 근거는 없는 상황이다.

다음은 1991년 4월 6일 중앙일보 2면 기사

◆ 취재일기 ‘화성 술래잡기’ 5년

『화성에서 다시는 부녀자 살인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 『최선을 다해 범인을 검거,주민들의 불안을 씻겠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지 한달만인 지난해 11월 태안읍에서 김모양(14)이 아홉번째로 희생됐을때 현장을 찾은 안응모 내무장관과 이종남 법무장관은 이같이 장담했었다.

또 김종필 민자당 대표위원ㆍ김대중 평민당 총재도 현장을 찾아가 조속한 범인검거와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했었다.

그러나 이같은 장담과 대책촉구에도 불구,사건은 미궁에 빠친채 열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첫 사건으로부터 따지면 얼굴없는 살인마와의 술래잡기 5년째. 이제 화성주민들의 호소는 체념과 절망에 가깝다.

『언제 누가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모든 주민이 떨고 있어요. 같은 유형의 사건이 번번히 반복되는데 경찰은 뭘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다간 화성 일대가 유령의 동네로 변해 버리겠어요.』

열번째 희생자인 권순상씨(69)의 옆집에 사는 박영심씨(52ㆍ여)는 열번째 범행이 보도된 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했다.

살인사건이 거듭되면서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은 대낮에도 음산한 분위기가 짙게 깔린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한두건도 아니고 첫 희생자가 생긴 이래 화성군내 태안(6명)ㆍ정남(1명)ㆍ팔탄(1명)ㆍ장안(1명)에서 이제 동탄면으로까지 「악마」의 손길은 넓혀지고 있지만 경찰의 수사는 장님 술래잡기다.

『잊을만하면 사건이 일어나 이제는 노이로제에 걸리다시피 됐어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외출은 아예 생각도 못해요. 등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가 자꾸 뒤로 눈길을 돌리는 버릇까지 생겼어요.』

동탄읍내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유경희씨(49ㆍ여)는 요즈음 대인공포증에 걸린 사람처럼 남자들만 보면 공연히 의심이 생겨 슬금슬금 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경찰들도 이제는 체념한듯 무표정할 뿐이었다.

『잊어버릴만 하면 사건이 나는데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요. 솔직히 말해 제 발로 걸어들어 오기나 바라는 심정일 뿐입니다.』

첫번째 사건부터 사건수사에 참여해 왔다는 한 고참 경찰관의 자조섞인 푸념은 무기력한 공권력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과연 연쇄살인범행에 대책은 없는 것일까. 정부가 무엇때문에 존재하는지 내무ㆍ법무장관부터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고대훈 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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