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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웃긴 30년… 인생무대 떠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투병 중인 내가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국민들도 큰 힘을 얻지 않겠어요? 가끔 숨이 차고 힘겹기도 하지만 여기 있을 때만큼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없어요. 꼭 나아서 4년 후 독일 월드컵에도 가야죠."

코미디언 이주일. 그는 끝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운동장에 나갈 정도로 축구광이었던 그는 지난 6월 한·일 월드컵 땐 아픈 몸을 이끌고 경기장을 찾아 한국팀의 경기를 지켜봤다. 그러나 7월 들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끝내 세상을 버렸다. 암 투병 10개월 만이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그가 자신의 끼를 발견한 것은 1960년대 초 육군 문선대에서 사회자로 이름을 떨치면서부터다. 64년 제대 후 아내와 아이들을 춘천 부모님 집에 맡긴 채 상경해 유랑극단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배삼룡·서영춘·곽규석을 흉내내는 익살 덕에 인기 만점이었지만 '못생긴' 얼굴 탓에 설움도 많았다. 어떤 유명 가수는 "못생긴 사회자가 소개하면 무대에 안나가겠다"며 고집을 부리기도 했고 '개성있는 얼굴' 탓에 대간첩작전 검문에 걸려 경찰서에서 모진 매를 맞은 적도 있었다.

80년 TBC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윤수일의 타잔' 코너에서 대사 한마디 없는 엑스트라로 출연했다가 얼떨결에 윤수일과 부딪쳐 폭소를 자아냈다. 이후 그는 정확히 '2주일' 만에 스타가 됐다. 그의 이름이 예명 주일(酒一)에서 이주일로 바뀐 건 그때부터다.

TV와 라디오, 클럽 쇼를 통해 그의 말과 춤이 널리 퍼져 나갔다. 양쪽 손을 허리에 바짝 붙인 채 엉덩이를 뒤로 빼고 걷는 '수지 큐'를 비롯,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깐요' '따지냐'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등 세상을 꼬집는 듯한 그의 말은 당시 답답한 세태에 청량제나 다름 없었다.

그에게 무대는 삶 그 자체였다. 80년대 극장식 밤무대 업소인 서울구락부를 시작으로 '초원의 집''무랑 루즈' 등 5~6개 업소에 출연해 코미디 쇼의 꽃을 피웠다. 최근까지도 그는 매년 연말 디너쇼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금을 생계가 어려운 노인들에게 전달했다. 25년간 그를 곁에서 지켜본 코미디언 이용식씨는 "지난해 말 병중에도 디너쇼를 하겠다며 연습을 하다 10분 만에 쓰러지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던 그에게 최대의 시련이 찾아왔다. 7대 독자였던 아들이 91년 미국 유학 중 한국에 잠시 들렀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그때부터 얼굴에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서"라며.

인생무상을 경험한 그는 다른 세계로 눈을 돌렸다. 바로 정치였다. 아들이 죽은 이듬해 "뭔가 보여주겠다"며 정가에 입문, 숱한 화제를 뿌리며 코미디언으로선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가 보여준 4년 간의 의정 활동은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회에서조차 무슨 말만 꺼내면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웃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대학입시 채점오류를 지적하고 폐교지 무단용도변경 사례를 적발하는 등 굵직한 성과를 올렸다.

"코미디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코미디언의 눈에도 정치는 역시 코미디로 보였던가. 96년 이주일다운 독설을 남긴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계를 떠났다.

SBS '이주일의 투나잇쇼'로 본업에 복귀한 후 경기도 분당에서 농장을 가꾸며 유유자적했다. 건강을 자랑하던 그는 지난해 10월 갑작스레 폐암 판정을 받은 후 병마와 싸우면서도 금연 홍보활동에 나섰다.

"나는 울고 있는데 여러분은 왜 웃으십니까."

99년 12월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그의 코미디 인생 30년을 회고하는 '이주일, 울고 웃긴 30년'이라는 공연이 열렸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축약한 극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무대에 엎드려 절규하듯 이렇게 외쳤다. 관객석은 곧 숙연해졌다.

그날 팬들은 웃으러 왔다가 결국 울고 갔다. 그의 죽음도 그렇다. 세상 사람들을 웃기러 왔고 결국은 그들을 울린 채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직도 할 일이 많다"던 그에겐 너무나도 짧은 62년의 세월이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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