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이은미>삶을 노래하는'맨발의 디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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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열대야나 천둥·번개로 잠 못이루는 밤인가 했더니 새벽 풀벌레 소리에 가을이 와 있다. 햇살도 가을을 머금고 눈부시게 익어가고 있다. 또 궂은비 내리고 늦더위 들겠지만, 때 되면 계절은 이렇게 오고 갈 것이다. 지난 10년간 맨발로 무대에 올라 5백회의 개인 콘서트 기록을 세우며 '라이브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은미씨가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섰다.

'맨발의 Passion(열정)'이란 타이틀을 단 이번 콘서트는 24일 부산을 시작으로 광주·의정부·서울·대전·창원·울산 등 13개 도시를 돌며 연말까지 계속된다.

붕어입(립싱크)에 외모와 댄스 등 눈요깃거리 가수들만 요란하게 대접받던 지난 10여년의 가요계가 올 여름 내내 돈 상납, 또 무슨 상납의 치부를 드러내며 벌벌 떨고 있다. 이러한 때 "노래는 삶과 혼의 교감이며 온 몸으로 내는 소리의 예술이지 쇼가 아니다"며 전국의 관객들과 무대에서 교감을 나누려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이씨를 서울 합정동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살아가며 느끼고, 생각하고, 겪은 그 모든 것을 '나 또한 그렇다'며 가슴 깊은 곳에서 나누는 것을 노래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좋고, 그립고, 못만나서 갈증 나고, 만나서 행복해서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라이브 공연을 고집하는 것은 음반은 시간이 멈추고 굳은 것이지만 공연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연체동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세 시간의 짧은 공연을 통해서 같은 시대에 같은 우수와 낭만·열정을 갖고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고 즐거움이라는 것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고교 시절 청계천에서 복사판 음반을 닥치는 대로 구해 소중하게 듣던 이씨는 1988년 신촌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처음 노래를 불렀다. 평소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선배의 권유를 못이겨 부른 그 첫노래로 기립 박수를 받은 후 음악의 길로 들어서 92년 첫 앨범 '기억 속으로'를 냈다.

4년간 집에서 음반만을 스승 삼아 노래를 배웠기에 선뜻 음반을 내주려는 회사가 없었다. 그럴 때 이씨는 "나 같은 보물을 놓친 것을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여곡절 끝에 뮤직디자인에서 나온 첫 앨범이 10년간 꾸준히 팔려 30만장 이상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해 12월 계몽아트홀에서 첫 콘서트를 가진 이후 지난 5월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6천여 청중과 함께 5백회 기념공연을 갖고 이번 전국순회 콘서트에 나선 것이다.

"두번째 콘서트는 93년 마당 세실극장에서 하루 2회 11일간 했어요. 닷새째 되는 날 '아'소리도 안나올 정도로 목이 꽉 잠기는 거예요. 내가 좋아서 노래를 부르는 건데 왜 이리 아프고 힘들까 생각하며 거울을 보니 거기 들어있는 얼굴은 제가 아니었어요. 청중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 허영 든 초라한 여자가 거기 있는 거였어요. 그래 화장도 지우고 몸 치장도 다 풀고 나니 마지막 남는 게 신발이었어요. 그래 신발도 벗어버리고 무대에 올랐지요. 그때부터 무대에서는 항상 맨발이었습니다."

레코딩할 때 가수들은 최고조로 긴장한다. 죽고나서도 음반은 남아 평가되기에 오는 그 긴장을 풀기 위해 가장 편안한 차림으로 녹음에 임한다. 바로 그런 제세로 긴장을 벗어 던지는 맨발의 혼신으로 이씨는 청중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노력한 만큼 있는대로 보여주려고, 잘 보이려는 허영심을 벗어던져 맨발이 된 이씨는 청중을 사로잡는 목소리와 무대 매너 때문에 '맨발의 카리스마'로 통한다.

"바이올리니스트·기타리스트는 있는데 우리나라에 왜 진정한 보컬리스트는 없는지 모르겠어요. 목소리 자체를 연주하는 사람, 저는 노래의 본분에 충실한 보컬리스트로 불렸으면 좋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에 미친듯 몰입해 투명한 크리스털같이 청중과 교감하려니 '카리스마'라는 말이 따라붙은 것 같습니다."

우수가 고인 서정적 발라드, 깊은 혼의 흐느낌 같은 재즈, 혹은 질풍노도와 같은 록 등 이씨의 노래 장르는 다양하다. 김광석·전인권·하덕규 등 선배들에게서 '음악을 편식하지 말라'는 좋은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라고 한다. 10년간 5백회 라이브 공연으로 버텼다면 '왕 원로'로 치부되는 가요계 현실에서 이씨는 "나이로부터도 자유롭고 싶다. 나는 항상 출발선상에 있다"며 나이 밝히길 거부한다.

"TV에서 '국민 가수'란 타이틀을 주었다 금방 빼앗아 버리면 그 가수는 어느새 원로가 되는 조로증에 우리 가요계는 빠져 있습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반만 많이 팔면 좋은 가수, 훌륭한 노래인양 치부되는 상업제일주의가 노래를 망치고 가요계를 썩게 합니다."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라는 노래 가사와 같이 가슴 그윽하게 전달되는 노래는 죽고, 보여주는 노래만 판쳐서야 되겠느냐는 이씨는 TV 가요프로그램이 변화해야 가요가 살고 건전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씨는 오는 11월 고은 시인 등 문인들과도 합동공연을 마련해 놓고 있다.

"지난해 백기완 선생님과 통일을 위한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내 노래가 좋은 것에 많이 쓰였으면 좋겠어요. 여성·환경 문제 등의 해결을 위한 데로 말입니다. 그러나 노래는 긍극적으로 메시지가 아니라 목소리의 예술이라는 것을 운동권 가요계도 십분 이해해 좀더 성숙한 노래로 운동의 효과를 높였으면 해요."

24일 부산에서 2천여 청중과 공연을 마친 이씨는 전화 통화에서 "가수는 역시 무대에서 노래로 청중과 통할 때만이 가수임을 실감한다"고 밝혔다.

글=이경철 문화전문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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