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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독서감상문대회 길잡이] 읽지 않으면 쓰기 어렵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초·중등학교를 시골에서 보낸 나는 책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책을 구할 수도 없었고 아니 책이 보이지 않았고, 주위에 책을 보는 사람도 없었다. 고교를 졸업까지 나는 내 주위에서 교과서 외에 책을 읽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우연히 선생이 된 후에야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깊은 산골 분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 먼 데 까지 월부 책장수가 찾아왔던 것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처음 본 책이 여섯권으로 된 『도스토옙스키』전집이었다.

그 후 그 월부 책장수에게 나는 박목월·이어령·헤르만 헷세·괴테·서정주 전집 등 많은 전집을 사서 읽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전주에 나가 헌책방을 뒤져 책들을 사기 시작했는데, 문학작품 뿐 아니고 역사·문화사·철학·미술에 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오랜 세월 책을 읽던 어느 날 나는 내가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혼자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그래, 저 책들을 사람들이 썼구나. 그래 나도 그럼 한번 글을 써 보자."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도 써보고, 시도 써보고, 산문도 써보고, 동시도 써보고, 평론도 써보고, 사회 비판적인 글도 써보고, 극본도 써보고…. 책을 읽을수록 생각은 무궁무진했고 글을 쓰는 일은 끝도 갓도 없었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뭉게 구름처럼 피어났다. 나는 그 생각들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생각들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내가 생각을 끌고 다니기도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글을 썼다기보다 나는 그때 내 생각들을 확인하고 정리했던 것이다.

시시때때로 엄청난 삶의 문제가 나를 캄캄하게 막고 있어서 절망하다가 다시 책을 읽다보면 그 문제가 풀렸고, 그 생각을 글로 써보면 그 문제는 시원하게 해결이 되어버렸다. 내가 써 놓은 글을 보고 어이없게도 내가 감동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어이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자기 감동이야말로 글 쓰기의 가장 기본이 된다는 것을, 자기 삶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도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글을 써서 누구에게 이런 글도 글이냐고 물어 볼 사람이 내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일이 그만두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는데 어느 날 나를 보니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고백하지만 나는 내가 쓴 시가 시인지 알지 못했다. 오랜 후에야 나는 내 시를 읽고 나 스스로 감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이나, 글을 쓰는 일이나 세상을 차근차근 알아가고 이해해 가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과 생각들을 정리하여 자기 삶의 든든한 근본으로 삼아 인생을 보다 가치 있고, 행복하게 사는 일 중의 가장 큰 일이,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난뒤의 감상문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좋은 글이란 것이 스스로를 설득시킬만큼 솔직하게 서술하면 된다고 믿는다. 좋은 글은 그 누구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 책을 읽으면 일어나는 무궁무진한 생각들과 감동들을 그냥 내버릴 일이 아니다. 그 생각들을, 그 감동들을 정리하면 글이 되는 것이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큰 숨을 쉬며 감동하고, 그 감동을 자기 생각으로 정리해서 글로 옮겨보자. 또 다른 세상에 가 닿는 크고 깊은 삶의 감동이 가슴에 벅차 오르며 인생의 새로운 길이 환하게 트일 것이다.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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