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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연기력 바탕 듬직한 무게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다 음달 13일 개봉 예정인 영화 '가문의 영광'(감독 정흥순)에 출연한 중견 배우 박근형(62)씨는 촬영장에서 재미있는 사건을 경험했다.

'이중섭'으로 대종상 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으며 활발히 활동했던 1970년대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를 기억하는 올드팬을 만나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여수 바닷가에선 집안에 있는 갓김치를 갖고 나와 "한번 드셔 보라"며 권하는 아줌마 앞에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은 뜨거운 환호는 없었으나 영화배우 박근형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았다.

박씨는 '가문의 영광'에서 호남 주먹계의 신화적 인물로 나온다. TV 드라마에서 주로 근엄한 중년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는 이번에 시쳇말로 완전히 망가졌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거칠지만 귀여운 성격의 보스를 연기하기 위해 꽁지 머리에 빨간 넥타이, 그리고 흰색 구두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 일당백(一當百)의 결투 장면을 소화해 내는 등 전성기 못지 않은 정열을 발산했다.

그는 지난해 '아버지'(97년) 이후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 '광시곡'에서 국방부장관 출신의 부패한 국회의원으로 나왔으나 영화가 실패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다.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의 김경미씨는 "카리스마 넘치는 박씨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숱한 드라마에서 보았던 아버지 역할과 달리 코믹한 배우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중량급 배우들이 영화계에 남아 연기 영역을 계속 넓혀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올 가을 극장가엔 이처럼 중견 배우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질 전망이다. 이순(耳順·60세)을 넘기고도 연기 현장에서 떠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 출동한다.

한국 영화의 소재 폭이 넓어지고, 캐릭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연기력이 검증된 중량급 스타들에 대한 요구가 커진 까닭이다. 영화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양념식 출연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주고, 후배 연기자도 끌어주는 조타수 같은 역할이다.

박씨와 실력을 다툴 배우는 신구(66)씨와 주현(61)씨다.

신씨는 1905년 창설된 한국 최초의 야구단을 통해 일제 식민화 직전 젊은이의 고민과 아픔, 그리고 사랑을 그린 'YMCA 야구단'(감독 김현석, 10월 3일 개봉)에서 4번 타자 송강호의 아버지로 출연한다. '반칙왕'에 이어 또다시 부자로 나오는 신씨와 송강호의 관계가 흥미롭다.

올 해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부드러운 듯 혹독한 투견장 주인 김금봉(일명 KGB)을 연기했던 신씨는 이번에 보수적인 서당 훈장을 맡았다. 아들에게 서당을 물려줄 생각을 하는 그는 처음엔 선비인 아들이 야구를 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지만 나중엔 아들의 운동을 적극 후원한다.

'친구'에서 조폭 출신의 유오성 아버지,'이것이 법이다'에서 묵묵한 형사반장을 맡는 등 최근 스크린 외출이 활발해진 주현씨는 '굳세어라 금순아'(감독 현남섭, 10월 11일 개봉)로 다시 관객에게 다가간다.

자신의 흰색 양복에 티끌 하나 용납 못하는 조폭 우두머리 백사를 연기한다. 룸살롱에 잡힌 남편을 구하러 나온 배두나에게서 토마토 세례를 받는 수모도 겪는다.

비언어 퍼포먼스극인 '난타'를 히트시킨 송승환씨가 이끄는 '굳세어라 금순아' 제작진은 전혀 웃길 것 같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폭소를 유도하는 배우를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결국 주씨를 선택했다.

주로 드라마에서 활동했던 중견 배우들의 스크린 입성은 그만큼 한국 영화계의 스펙트럼이 넓어졌음을 보여준다.

반짝 스타의 명성보다 연기력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깊어진 것이다.

지난해 이후 충무로의 중심축이 청춘 남녀의 이별과 사랑, 혹은 치고 받는 액션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빚어지는 웃음을 주목하는 코미디 쪽으로 이동한 것도 왕년의 은막 스타에 대한 수요를 증폭시킨 것으로 풀이된다.

연령·성격 등 다양한 인물을 제시하는 동시에 작품이 경박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데 이들 '어른'이 필요한 것이다.

예컨대 지난해 히트작 '엽기적인 그녀'와 '달마야 놀자'는 김인문(61)씨의 힘없는 듯 진득한 얼굴을, 올 상반기 화제작인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이대근(61)씨의 무게있는 코믹 연기를 빼놓고 얘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은 주연까지 맡지는 못했다. 영화의 주·조연 구분이 크게 의미있는 건 아니지만, 현재 충무로의 노장들은 젊은 배우를 '보좌'하는 수준이다. 그만큼 한국 영화가 개척할 분야가 많다는 뜻이 된다.

이마의 주름살 하나하나에 삶의 역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주디 덴치의 '아이리스'나 숀 코너리의 '파인딩 포레스터' 같은 우리 영화를 보려면 아직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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