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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항법 장치 이용 최단거리 항로 南下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북한의 순종식(70)씨 일가족 등 21명의 주민들이 배를 타고 귀순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치밀한 준비와 북한 당국의 느슨해진 선박 통제가 어우러진 결과다. 여기에 荀씨의 아들이자 선장인 용범(45)씨의 풍부한 항해 경험과 거사에 이용한 배가 위성항법장치(GPS)가 장착된 중국 어선이라는 점도 엑소더스 성공에 한몫했다.

◇탈북 동기와 준비=荀씨 일가족 등이 탈북 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은 두달 전부터. 정부 합동신문 조사결과, 평안북도 선천 수산기지에 근무하는 용범씨는 이번에 타고온 '대두 8003호'의 선장을 맡게 되면서 배 안에 비치된 TV를 통해 남한 사회의 활기차고 풍요로운 모습을 보고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향이 논산인 아버지 荀씨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남한 사회를 동경해왔다. 정부 관계자는 "荀씨는 합동신문 과정에서 10년 전부터 탈북을 생각해온 것으로 진술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이용한 선박은 탈북의 불안감을 떨쳐주었다. 대두 8003호는 북한이 불법어로 단속과정에서 압류한 중국 어선으로 GPS가 달려 있어 망망대해에서도 좌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탈북 과정=荀씨 등은 포구를 떠난 지 두시간 만에 북한 영해를 벗어났다. 북한 군인과 함정의 경계망을 피해 배를 최대속도인 11노트로 질주해 오전 6시쯤 공해상으로 빠져나왔다. 비바람 속이었지만 GPS로 '탈북'을 확인한 이들은 곧바로 선박을 중국 어선으로 위장한 뒤 항로를 남쪽으로 돌렸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선장 용범씨는 도착 직후 1차 조사에서 "공해상에 진입한 뒤 여러 차례 중국어선을 만났다"며 "자칫 중국으로 나포될 수도 있다고 보고 이들 배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남하했다"고 말했다.

이후 만 24시간이 지난 18일 오전 4시쯤 북방한계선(NLL)을 넘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 한다. 용범씨는 다시 뱃머리를 서해쪽으로 돌렸고 18일 오후 5시30분쯤 해경 119경비정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해경은 이들의 귀순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혼선을 겪었다. 처음에는 불법 어로에 나선 중국 선박으로 오인했다. 그러나 조타실에서 여자 한명을 발견하곤 밀입국 선박으로 알고 접근했다가 배쪽에서 "남한에 가려고 북한에서 왔다"는 荀씨의 절박한 얘기를 접했다. 해경은 "이들은 북한을 떠나 인천항에 도착하기까지 2백70마일의 뱃길을 최단거리로 항해했다"고 밝혔다. GPS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장 용범씨의 항해 경험 또한 큰 역할을 했다. 우리 해경에 발견될 당시 서해상의 날씨는 북동풍이 초속 4~6m, 파도 높이 0.5m, 가시 거리 0.5m에 비바람까지 몰아쳐 항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게다가 대두호의 정원은 5~6명이었다. 그래서 해경은 용범씨의 오랜 경험 덕분에 탈북이 성공했을 것으로 본다.

◇114 지도국=탈북 어선이 소속된 북한의 114 지도국은 북한의 어선을 관리·통제하는 기관 중 하나다. 군 정보당국에 따르면 지도국은 우리의 해양수산부와 같은 북한 내각 수산성의 산하기관으로 북한의 각종 어선이 이 지도국에 소속돼 있다. 지도국은 지역별로 번호가 매겨지는데 이번에 밝혀진 114 지도국은 북한 선천 일대의 어선을 실질적으로 관리한다.

荀씨 일가를 태운 소형 어선(21t)은 북한 해역을 침범해 압류한 중국 어선으로 114 지도국에 등록·관리돼 온 것으로 보인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오영환 기자, 인천=엄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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