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본업은 권력 비판 편가르기 할 때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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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 경제가 한창 부흥하던 1970년대 중반, 전쟁에 대한 책임 소재를 둘러싼 역사 논쟁이 불거졌다. 우파는 히틀러와 괴벨스 등 소수 나치 수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고, 좌파는 독일 국민 전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 경제 부흥의 한 이론가였던 자유주의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는 정치인 못지 않게 대학의 지식인, 판·검사 등 법조인,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인의 책임도 크다고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대학 교수들이 젊은이들을 잘 교육시키고, 법조인들이 사회 정의를 위해 제 임무를 다하고, 언론인이 권력을 제대로 비판하고 감시했더라면 나치즘의 준동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2 독일에서 총선 열기가 한층 고조되던 지난주 우파 신문인 빌트는 "좌파 정당인 사민당·녹색당·민사당의 다수 국회의원과 우파인 기민당 국회의원 몇명이 공무로 축적된 비행기 마일리지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폭로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사민당 원내총무 프란츠 뮌테페링은 법정 소송을 냈고, 현 독일 총리이자 사민당 총재인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우파 언론의 좌파 정치인에 대한 매도"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우파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뿐 아니라 좌파 성향의 슈피겔지와 독일신문협회까지 나서 "슈뢰더 및 사민당 국회의원들의 이러한 행동은 독일의 언론 자유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집중 비판했다. 그 결과 뮌테페링은 소송을 취하했고, 슈뢰더와 다른 정치인들도 빌트지에 대한 비판을 철회했다.

#3 자유당 말기의 경향신문 폐간, 유신 정권의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현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사주 구속 등 한국의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한국의 언론들은 막강한 정치 권력을 비판하지 못하고 언론 탄압에 대해 침묵했다.

이러한 역사로 언론인 간의 상호 존중·협력보다 이전투구와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몰두하는 현상을 보였다.

아직도 한국 언론은 이같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큰 신문과 작은 신문, 정부 소유 매체와 민간 소유 매체, 신문과 방송 등이 정치 권력에 대한 비판보다 상호 반목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무조사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추징당하고 여론 재판을 받은 언론사들은 세무조사를 언론 탄압으로, 친정부적인 논조를 보이는 언론사들은 이것을 언론 개혁으로 주장하고 있다.

#4 현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언론사들의 정치적 입장이 대립하면서 언론사 간의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상호 비방이 거세지면서 소송이 더욱 많아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동아와 MBC·한겨레를 상대로 한 소송이다. 지면이나 화면을 통해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언론사들이 굳이 수십억원의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공론의 장임을 포기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라고 언론학계는 비판하고 있다.

#5 독일의 사회사상가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정치·경제·언론·종교·교육 등 인간세계의 하부 시스템들은 각기 자기작동 메커니즘이 있다고 한다. 즉 정치는 권력을, 기업은 돈을, 종교는 자비와 사랑을, 학교는 교육을, 언론은 사회 환경 감시와 비판을 고유 가치로 보고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 언론도 네편, 내편으로 편 가르기를 하거나 정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기보다 권력 비판과 진실 전달이라는 언론 본연의 임무를 추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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