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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유럽이민의통로네덜란드암스테르담:우경화·테러…'톨레랑스<관용>'문화 위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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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포르투완, 당신이 살해당한 날 유럽의 민주주의는 죽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담광장 앞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추모탑에 이런 추모메시지가 걸려 있었다. 취재진이 도착한 5월 7일 네덜란드 극우정당의 지도자 핌 포르투완 당수가 총선 직전에 한 동물보호 운동가에게 피살당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기념탑 주변에는 그를 추모하는 인파가 장사진을 이뤘고 많은 사람이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 메시지들을 읽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고향 로테르담에서는 추도 시위가 계속됐으며, TV는 그가 생전에 한 인터뷰를 특집으로 연일 내보내는 등 전국이 추모 분위기에 휩싸였다.

취재진으로서는 행운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네덜란드로 오기 전 프랑스에 머물 당시 극우정당의 장 르펜이 결선투표에 진출해 프랑스 사회가 경악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프랑스 언론은 우리 기준으로 보면 편파보도에 가까울 정도로 보도·해설·토론을 통해 르펜을 난타했다. 이틀 뒤 네덜란드에서 극우현상의 극단적 장면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그 직후인 지난 5월 15일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핌 포르투완 리스트'(LPF)는 창당 3개월 만에 제2당으로 급부상했다.

17세기 이후 처음 발생한 정치인 암살사건에 자유롭고 개방적인 네덜란드가 놀라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시의 공식 여행 안내문에는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가 여성이 아닐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매춘과 동성애를 인정하는 네덜란드의 개방적인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좀 역설적이게도 '금지하는 것만 금지하는' 개방적인 이 나라엔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병존하고 있는 듯했다. 극우가 가장 혐오하는 동성애자인 핌 포르투완. 모스크·교회·포르노 가게가 이웃하고 있는 거리. 모든 것이 다른 문화에 개방적인 성격을 그대로 보여줬다.

항구 도시인 암스테르담은 17세기 이래로 이민자들의 출입문이었다.일찍이 이민자에게 문호를 개방해 투표권이 부여됐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극우정당이 제2당으로 득세하는 사실과 야만적인 정치적 암살 사건이 일어난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분위기였다.

톨레랑스(관용)의 현장을 찾아 네덜란드에 왔던 우리도 자연스럽게 톨레랑스 그 자체가 위기에 부닥쳐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그 직접적인 현상은 바로 유럽의 우경화였다.

유럽 이민의 통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전반에 '반(反)이민'이라는 현실적 이슈가 두드러졌다. 지난 10년간 유럽연합(EU)지역에는 약 1천5백만명의 이민자가 유입됐고, 서유럽에는 최대 3백만명의 불법 이민자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암스테르담의 중심가 담 광장에서도 백인보다 유색인종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이들 이민자는 실업을 부추기고 사회복지 예산을 축내면서 치안의 불안까지 초래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파들은 반 외국인 감정을 선동하며 불안에 싸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그러다 보니 인종주의적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없다. 핌 포르투완의 경우도 생전의 인터뷰에서 "이슬람은 열등한 문명"이며,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네덜란드 헌법조항을 고치고 새로운 이민자들의 유입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인종주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우경화는 유럽의 위기의식의 표현이다. 여기에 유럽은 어떤 식으로든 대답해야 한다'. 호텔에서 받아본 '더 타임스'지(5월 8일자)기사의 요지는 이랬다. 이 기사는 2000년 이후 오스트리아·이탈리아·덴마크·노르웨이·포르투갈·네덜란드·프랑스 등 유럽의 극우현상을 도표로 그려 눈길을 끌었다.

이같은 현상은 근본적으로는 사회보장과 복지를 중시하는 유럽식 사회 모델이 세계화로 위협받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핌 포르투완도 사회적 위협이 되고 있는 이민자 문제의 해결과 함께 '기업가 보호'나 '세금감면' 등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핌 포르투완은 우파적 방식이긴 하지만 정체된 네덜란드에 심각한 물음을 던졌다는 것이 언론과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유럽의 우경화는 정치·사회적으로 올바른 길인지의 여부를 떠나 유럽이 공동으로 느끼는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고, 유럽 사회는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만난 저명한 정치학 교수 마인더트 페느마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장의 논리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도덕의 규율'이고 그것은 역시 톨레랑스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유럽의 위기가 바로 이 '톨레랑스의 위기'라고까지 주장했다.

취재진은 르펜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비판적 분위기와 달리 네덜란드의 추모 열기에 처음에는 다소 의아해했던 것도 사실이다. 페느마 교수의 설명은 명쾌했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네덜란드에선 관용과 다양성은 공존의 중요한 원칙이며,이를 폭력적 방식으로 깨어버린 암살에 대해 시민들이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는 시장경쟁의 논리에 돛을 잃은 유럽이 톨레랑스라는 방향타로 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도 톨레랑스다'라고 주장하는 페느마 교수의 말에 쉽게 수긍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런 의문 때문이었다.

암스테르담=김의영(경희대·정치학)·이동수(경희대·정치철학)교수, 김창호 학술전문위원

협찬 : 대한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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