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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0>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4.가요인생 시작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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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59년 4월 15일. 내 가요 인생이 시작된 날이다.

처음엔 '한달에 한두번'이라는 파피의 말에 얼떨결에 시작한 쇼 출연이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한달 내내 거의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프로의 쓴맛을 경험한 것이다.

'운명의 신'은 데뷔 무대에서부터 장난을 쳤다. 무대는 서울 용산 삼각지 근처의 사병클럽이었다. 그날 밤 파피악단의 반주로 '쇼보트'쇼의 1부가 열렸다. 40여분간의 댄스뮤직 시간이 지나 본무대가 마련됐다. 여가수 '미스 첸'과 함께 내가 1시간 이상 되는 이 무대의 주역이었다.

"어차피 뚫고 지나야 할 관문이다. 평소 실력대로만 하자."

한창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파피가 거들었다.

"어제 부른 '유 돈트 노 미'를 첫곡으로 하지."

파피가 전날 악단의 자체 오디션에서 나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이 데뷔 무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악단장 파피의 사인에 따라 반주가 시작됐다.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무대 앞으로 걸어나갔다. 언뜻 객석을 보니 사람들의 머리가 남산만해 보였다.

아뿔싸! 눈앞이 캄캄했다. 반주에 겨우 맞춰 '유, 기브 유어 핸드 투 미' 어쩌구 하며 첫 몇소절은 따라 했지만 그 뒤에서 꽉 막히고 말았다. 도무지 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분장실로 뛰어들었다.

쇼는 악단의 임기응변에 의해 대충 마칠 수 있었다. 나는 분장실에 들어온 파피를 볼 면목이 없었다.

"저는 가수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 파피의 반응은 너무 뜻밖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럴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열심히 해야지."

아마 이때 파피가 다시 무대에 세우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가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40여년의 가수 인생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 나에게 그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로 남아 있다.

두번째 무대는 의정부 하사관 클럽이었다. 데뷔 무대의 실수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회하겠다고 벼르고 있던 터라 휘황찬란한 조명쯤은 이제 대수롭지 않았다. 걸음걸이도 가벼웠다.

그러나 이런 자신감은 그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엔 반주와 노래가 전혀 틀리게 나갔다. 악단의 교묘한 위장술로 망신은 면했으나, 내가 듣기에도 음정은 엉망이었다. 쇼가 끝나자 '쇼보트'의 단장이 파피를 닦달하는 광경이 목격됐다.

"여기가 연습무대인 줄 알아. 다시 그런 풋내기를 출연시키면 각오해."

나는 단장의 엄포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정말 자신없습니다. 내일부터 나오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파피는 전과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나를 위로했다. 이미 엎지른 물이란 심정으로 나는 한번만 더 무대에 서기로 했다. 다음날도 의정부 무대였다. 기분전환도 할 겸 이번엔 페리 코모의 '로즈 태투(장미 문신)'를 부르기로 했다.

그 결과 정말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여기저기에서 앙코르가 터졌다. 다시 불러달라는 주문이 무려 다섯차례나 계속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단장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기 시작했다. 파피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만 계속 나가면 돼." 그는 이 한마디로 만족감을 대신했다. 당시 미8군 쇼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단체 오디션을 받는 게 아니었다. 개별적인 오디션을 통해 등급을 부여받아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게 돼 있었다. 파피와 함께 한 데뷔 시절은 일종의 임시고용인 신분이었던 셈이다.

내가 정식으로 등급심사를 받은 것은 데뷔 날로부터 보름 뒤의 일이다. 꽤 빨리 찾아온 기회였다. 쇼를 관장하는 미군 네댓명이 심사위원이었다. "준비한 노래를 불러보라"는 심사위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고엽'과 '유 돈트 노 미'를 불렀다.

운좋게 나는 'A클래스'로 분류됐다. 아마 한 흑인 심사위원이 엄청 후한 점수를 준 모양이었다. 그는 내 목소리가 마치 주단처럼 부드럽다 해서 '벨벳 보이스'라며 치켜세웠다.

A급의 월급은 20만환이었다. 당시 은행원 월급의 네배 정도 되는 거금이었다. "가정교사를 그만두고 목돈을 챙기라"던 파피의 말이 실감났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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