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9>제103화人生은 나그네길: 3. 고시 접고 가수의 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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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서울대에 가수 떴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연주계로 번졌다. 친구의 형이 맨 먼저 나에게 눈독을 들였다. 미 8군 쇼에서 '파피악단'을 이끌고 있던 김안영씨였다. 파피(poppy)는 그의 예명이었다.

친구 김광영이 자기 형에게 나를 소개했다. 지금은 사이판에서 모텔을 경영하는 죽마고우다.

김광영은 진작부터 내 노래 실력을 인정한 몇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형에게 소개할 참이었으나 마땅한 계기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서울대 장기 놀이 대회'가 촉매였다.

"허락도 없이 형에게 너를 추천했다. 제대로 노래 실력을 검증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랬어."

나는 마지 못해 동의하는 척하며 파피를 만났다. 1959년 봄 서울대 법대 졸업 무렵이다. 취직은 안중에도 없고 중·고생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용돈이나 벌던 때였다.

"성준(최희준의 본명)아,돈 안되는 가정교사 때려치우고 노래나 해라."

파피는 '백수'인 내 처지를 교묘하게 파고 들었다. "한달에 두어 번만 출연해도 목돈을 챙길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유혹했다.

"정말, 두어 번이면 됩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일단 두루뭉술하게 답을 해두고 헤어졌다. 당시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미래에 대한 뚜렷한 설계가 없었다. 더구나 직업 가수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는 57년 휴학 중 제8회 사법고시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 관악산 삼막사 등지를 오가며 법전을 파고들었으나 높은 고시 문턱을 넘지 못했다.

경제학 시험이 결정적인 낙방원인이었다. 시험문제는 '후진국 자립경제의 의의를 논하라'였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문제였다. 시험 도중 백지를 내고 나와 버렸다. 불합격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나는 오만했다.

"고시에서 떨어진 것은 시험제도가 잘못된 탓이다. 그러니 제도가 바뀌지 않을 한 내가 다시 고시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괜히 제도 트집을 잡으며 친구들에게 이걸 '폭탄선언'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좋게 말해 배짱 두둑한 시절이었다.

아무튼 파피와의 만남은 '나'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됐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고시를 포기했으니 판·검사는 날아갔고,그럼 뭐를 한담."

이승만 정권 말기의 불안한 시절, 비록 명문대를 나와도 마땅한 취직자리가 궁했다. 고시 아니면 은행원이 되는 게 최고의 선택이었다. 은행원이 되긴 싫었다.

일단 나는 파피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한달에 두어 번'이라고 했으니 크게 매일 일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내 첫 무대는 그해 4월 15일 용산 삼각지 근처의 사병(EM)클럽이었다. 쇼단은 파피가 속한 '쇼보트'였다. 마침 마땅한 남자 가수가 없어 이를 물색 중이던 파피는 나를 그 재목으로 기용할 생각이었다. 이 '시험무대'만 통과하면 쇼단의 멤버가 되는 것이다. 쇼단의 멤버를 뽑는 일은 각 단체에 어느 정도 재량권이 있었다.

파피는 데뷔하기 전날 자체 오디션을 겸해 자신의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어떤 노래를 좋아하느냐."

파피는 먼저 내 노래 취향부터 물었다.

"냇 킹 콜·팻 분·엘비스 프레슬리 등 외국 가수의 노래는 거의 다 좋아합니다."

그러자 그는 "가수는 무엇보다 개성이 중요하다"며 다른 가수의 곡을 추천했다. 제리 베일의 '유 돈 노 미'였다. 웬만한 외국곡의 가사는 달달 외웠던 터라 이 곡을 부르는 데 별 문제는 없었다. 그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파피 악단의 반주에 맞춰 얼떨결에 이 노래를 불렀다. 파피는 "의외로 목소리가 좋다"며 흐뭇해했다. 다음날 드디어 데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당시 '쇼보트'는 두명의 가수와 네댓명의 무용수, 아홉명 정도의 악단으로 짜여져 있었다. 미 8군 쇼의 일반적인 구성이 그랬다.

나는 '미스 첸'이라는 중국 여자와 함께 이 쇼단의 투톱 남녀 가수로 가수 활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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