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살림 합치긴 했는데…" 합병 이후가 진짜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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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통합 국민은행에서 과거 출신을 따지면 정관을 고쳐서라도 몇 십년 동안 두 은행 출신은 행장이 되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다."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친 국민은행의 김정태 행장은 한솥밥을 먹게 된 직원들이 화합하지 못할 경우 내부승진은 꿈도 꾸지말라고 경고했다. 서로 조직문화가 다른 은행간 합병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1976년 옛 서울은행과 한국신탁은행을 합쳐 탄생한 서울신탁은행(현 서울은행)은 출신은행별로 형성된 내부의 파벌싸움이 그칠 줄 몰랐다. 인사부에는 두 은행 출신들이 비슷하게 포진해 인사 때 마다 티격태격했고, 행장은 아예 두 은행 출신이 번갈아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족이란 의식은커녕 서로 상대편 흠집잡기에 바빴고, 은행경영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이같은 불협화음이 서울은행의 부실을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옛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한 우리은행은 출신은행별로 업무용어나 일처리 방식이 달라 초기에 적지 않은 혼선을 겪었다. 심지어 출근할 때 하는 아침 인사마저 달라 오해를 살 정도였다.

일본 다이이치강교(第一勸業)은행은 합병 후 입행한 세대가 임원이 된 지난 91년에야 인사부를 합쳤다. 그 때까지 20년간 말만 합쳤을 뿐 실은 한지붕 두가족 생활을 계속한 셈이다. 지난 97년 시티은행과 트래블러스그룹이 합친 시티그룹에서도 제임스 디먼 시티그룹 사장이 양측간 알력을 배기지 못하고 결국 사표를 내야 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합병을 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형화를 포기했다가는 살아남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하나은행이 서울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나서고, 신한은행과 한미은행이 합병 협상을 벌이는 것은 합병에 따른 어려움을 몰라서가 아니다. 국내 은행시장은 이미 합병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어차피 합병이 불가피한 바에야 합병의 부작용을 누가 빨리 털어내고 화합하느냐가 경쟁의 관건이 됐다. 인화(人和)의 기술이 중요해진 이유다.

은행장들도 기업문화의 통합을 특히 강조한다.

김정태 행장은 "앞으로 모든 임직원의 종전 인사기록 카드를 없애고 능력과 성과위주의 인사문화를 정착시키겠다"고 말했다. 출신은행별 구분을 철저히 없애겠다는 각오다.

김승유 하나은행장은 "대형화 과정에서 은행의 정체성이 바뀔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합병에 따른 후유증을 줄이자면 인수하는 쪽도 바뀔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점령군식으로 들어가서는 조직의 화합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은 합병추진 초기부터 '기업문화 태스크포스팀'을 만들고 기업문화의 화학적 결합을 위해 삼성경제연구소로부터 컨설팅을 받았다. 통합은행 출범 때부터 사내 전산망을 통해 '열린 대화방'을 개설해 직원들의 대화를 장려하고 있다. 서로 다르게 표현하던 업무용어 2백여개를 통일하고, '내부 홍보팀'까지 만들어 서로의 '눈과 입'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합병은행 직원들은 인사가 있고 나면 어디 출신이 많이 승진했는지를 따져본다. 합병은행들이 성공할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대목이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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