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명령형 계획경제'대폭 수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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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지난해 10월에 내린 경제 관련 지시 내용의 요체는 ▶중앙정부가 갖고 있던 생산관리 계획 권한의 하부 이양▶지방 공장에 자체 생산품에 대한 가격결정권 부여다.

金위원장의 이같은 지시는 만성적인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생산력 향상이 관건이라는 판단 아래 기존의 '중앙집권적 명령형 계획경제 체제'에 사실상 수정을 가한 조치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북한은 그동안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나름대로 정책을 추진했었다. 1984년에 확대·강화된 기업의 독립채산제 실시가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이 정책은 불합리한 생산 할당량 배정, 생산량의 허위보고 등 '명령형 계획경제 제도'에 따른 부작용으로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경제관리 개선책을 강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이어 닥친 각종 재해 등으로 그런 개선책을 확고하게 밀고나갈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만성적인 식량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지난 10년간 경제사정이 최악을 향해 치달았고, 이제는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국가검열기관을 총동원, 기업소 등 생산 주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실사작업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결과 생산 주체들이 국가계획위원회에 보고한 수치가 거의 허위로 드러났다는 게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金위원장의 이번 지시는 일종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특별실사 결과 생산관리 계획 분야에 손을 대지 않고서는 난국 타개책이 나올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이 분야에 대한 권한 이양을 결정한 것으로 분석된다.

◇권한 이양, 책임 추궁=金위원장의 지시 내용에는 무상 공급의 축소, 상품 가치를 반영한 가격 산정과 이에 따른 임금 인상, 실리 우선 및 분배에서의 평균주의 배제 등 경제 전반에 걸친 개선책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개선정책의 근본 토대는 바로 '생산관리 계획의 하부 이양'이다. 고려대 아시아문제 연구소 김연철 연구교수는 "상품의 가치를 제대로 부여하고 노동자의 인센티브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선 생산관리 계획을 스스로 입안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차원에서 북한의 계획 권한 이양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金위원장이 '전략적 지표에 대한 계획만 중앙정부가 관장한다'고 밝힌 대목은 권한 이양이 광범위하게 확대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지방공장에서 생산하는 상품 가격을 해당 공장이 결정토록 한 것이 한 예다.

지금까지 상품 가격은 국가가격제정국이 일률적으로 정해온 점을 감안하면 이번에 비록 '국가가 정한 가격 범위'라는 조건은 있지만, 생산 주체가 상품 가격을 정하도록 한 점은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와 함께 金위원장은 "계획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획을 현실성있게 세워 어김없이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중앙정부 권한을 넘겨줄테니 그에 따른 해당 기관·기업의 책임은 철저히 묻겠다'는 의미다.

그동안 북한은 기존과 다른 경제정책을 내놓을 때 '생산수단의 전인민적 소유에 기초한 계획경제의 틀은 변함없다'고 역설해 왔지만, 이번 金위원장의 지시로 그 틀은 급속한 '전변(轉變)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평가된다.

안희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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