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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서 종식 희망 발견한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내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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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11면

1937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장군(위의 사진)의 독재를 거치며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바스크와 안달루시아 지역은 갈가리 찢어져 반목했다. 피카소의 명화로 유명한 게르니카 대학살(왼쪽 사진)이 일어난 시기도 스페인 내전 때였다. [중앙포토]

낙천적이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안달루시아인은 기도를 하고, 명예에 집착하며 일을 경시하는 카스티야인은 꿈을 꾸며, 거칠고 부지런한 바스크인은 일을 하고, 경제관념과 이익에 밝은 카탈루냐인은 저축을 한다.

스페인 축구의 힘은 분열의 극복

스페인 사람들이 말하는, 스페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얘기다. 정열의 나라, 태양과 투우와 플라멩코의 나라로 알려진 스페인은 생각보다 크고 복잡하다. 한반도 2.5배 면적(50만㎢)에 4600만 명이 모여 사는 스페인은 4개 공식 언어(카스티야어, 갈리시아어, 카탈루냐어, 바스크어)와 7개의 방언이 통용되며, 17개 자치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올여름 스페인이 지구촌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7월 12일(한국시간) 끝난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80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무적함대’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면서도 4강에 딱 한 번 올라갔을 정도로 월드컵과 인연이 없었던 스페인. 그들이 독일과 네덜란드를 잇따라 꺾고 월드컵에 입맞춤한 배경에는 ‘철천지 원수’의 ‘극적인 화해’가 있었다.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하는 카스티야와 바르셀로나가 리드하는 카탈루냐, 내전과 독재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서로를 배척하고 미워하던 두 지역은 월드컵이라는 지구촌 최고 축제의 마당에서 손을 잡았다. 그리고 멋진 성취를 이뤄냈다.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재 밝은 카탈루냐, 꿈꾸는 카스티야
지난해 5월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발렌시아에서 아틀레틱 빌바오와 FC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국왕컵 결승전이 열렸다. 빌바오와 바르셀로나 팬들이 중립지역인 발렌시아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경기 전 스페인 국가가 연주되는 순간 이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라운드를 뒤로 하고 돌아섰다. 스페인 국가를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였다. 스페인 국가는 곡만 있고 가사는 없다. 4개 공식 언어 중 하나만을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빌바오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다. 이 도시를 연고로 하는 아틀레틱 빌바오 구단은 ‘바스크 순혈주의’를 100년 넘게 지켜오고 있다. 외국인 선수를 데려오지 않는 것은 물론 스페인 선수도 바스크 지역 출신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1898년 창단 이후 2부리그로 강등된 적이 한 번도 없고, 국왕컵에서 23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 투쟁과 테러를 불사하는 분리주의 단체(ETA)의 근거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바스크는 스페인의 17개 자치지역 중 가장 강력하게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

바르셀로나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외치는 카탈루냐 지역의 맹주다. 이들은 주류인 카스티야 사람들과는 혈통이 다르고, 농업 중심의 카스티야에 비해 상공업을 일찍 받아들여 돈을 많이 벌었다. 지금도 마드리드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 바르셀로나는 경제와 산업의 중심이라고 말을 한다.

카스티야와 카탈루냐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건 1937년 일어난 스페인 내전과 이후 이어진 프랑코 장군의 독재 때문이다. 두 차례 선거에서 1승씩을 주고받은 좌파와 우파가 무력 충돌해 내전이 발발했다. 대도시 노동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좌파를 형성했고, 우파는 왕족과 귀족 등 기득권 세력이었다. 좌파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나눠 분열하는 사이 우파는 프랑코 장군을 앞세워 단결했다. 내전은 우파의 승리로 끝났고 1939년부터 75년까지 37년간 프랑코 독재가 이어졌다.

‘게르니카 대학살’이 일어난 것도 스페인 내전 때였다. 1937년 4월 26일은 바스크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의 장날이었다. 점심을 마친 오후 4시쯤 독일 폭격기들이 나타나 마을에 폭탄을 쏟아부었다. 순식간에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1500명의 마을 주민과 소와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독재자 히틀러의 소행이었다. 이 참혹한 순간을 그린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이 ‘게르니카’다. 세로 349.3㎝, 가로 776.6㎝의 대작인 게르니카는 현재 마드리드 왕립 소피아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루이스 피구에게 돼지머리를 던진 이유
정권을 잡은 프랑코는 모든 정당을 해산시킨 뒤 민족주의자와 공화주의자를 잡아들여 모질게 고문하고 처형하기도 했다.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카스티야 지역에 터전을 잡은 프랑코 정권은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 카탈루냐의 부를 수탈했다. 그는 카탈루냐어와 바스크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금지시켰고 자치권도 빼앗아 버렸다. 일종의 문화 말살 정책이었다.

그런데 프랑코가 유일하게 허용한 것이 바로 FC 바르셀로나의 축구 경기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카탈루냐 사람들의 분노와 응어리를 축구팀을 통해 해소하도록 해 저항 의지를 분산시키려는 일종의 ‘스포츠 우민화’ 정책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FC 바르셀로나의 홈 구장인 캄프 누는 카탈루냐인들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프랑코 정권에 대한 울분을 그들의 언어로 표출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해석은 프랑코가 워낙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를 통해서도 바르셀로나를 이겨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코는 수십 년간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 명단을 줄줄 욀 정도였다. 프랑코 정권은 레알 마드리드가 전 세계 유명 선수들을 스카우트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한 반면 바르셀로나가 좋은 선수를 데려오지 못하게 방해했다.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가 맞붙는 경기를 ‘엘 클라시코 더비’라고 부른다. 더비 매치(지역 라이벌끼리의 대결) 중에서도 고전(클래식)이라는 뜻이다. 특히 바르셀로나 팬에게 레알 마드리드는 ‘반드시 이겨야 할 철천지 원수’였다. 나이 든 바르셀로나 팬들은 “지금도 캄프 누에 오면 프랑코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바르셀로나를 ‘바르샤’라고 발음하는 카탈루냐 사람들에게 FC 바르셀로나는 말 그대로 ‘클럽 이상의 클럽’(바르셀로나의 모토)이다.

그러니 바르셀로나에서 6년간 뛰다가 2000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루이스 피구(38·포르투갈)는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한 것인가. 피구가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 처음으로 캄프 누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 더비. 코너킥을 하러 가는 피구를 향해 관중이 삶은 돼지머리와 각종 오물을 던졌다. 요즘도 유럽 축구팬 사이에 떠도는 유머가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빨리 죽는 방법은? 시내 한복판에서 ‘아이 러브 피구(I love Figo)’ 노래를 부르는 것.”

스페인은 이상하게도 월드컵과 인연이 없었다. 뛰어난 전력을 보유하고도 번번이 토너먼트에서 낙마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8강에서 한국에 ‘억울하게’ 졌고,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도 16강전에서 프랑스에 덜미를 잡혔다. ‘유럽의 월드컵’인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 축구 대표팀은 모래알이었다. 레알 마드리드 선수는 바르셀로나 동료에게 패스도 하지 않았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레알 마드리드 출신이 주축인 대표팀이 지는 걸 오히려 고소해 했다.

그러던 스페인이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유로 2008)에서 떡하니 우승했다. 결승에서 막강 독일을 일방적으로 농락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패스와 예리한 마무리에 전문가들은 ‘현대 축구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2년 뒤 남아공 월드컵도 제패했다.

통합을 향한 가느다란 실마리, 그것은 축구
무엇이 바뀐 것일까. 가장 눈에 띈 것은 FC 바르셀로나 출신 선수들이 대표팀의 중심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팀 내 최다인 5골을 넣은 다비드 비야,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에서 연장 11분 결승골을 터뜨린 이니에스타, 중원의 사령탑 사비 에르난데스가 모두 바르셀로나 소속이다. 수비의 핵인 푸욜과 피케, 힘있는 수비형 미드필더 부스케츠도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뛰는 선수다. 주전 11명 중 6~7명이 바르셀로나 소속이어서 외신과 스페인 언론은 일제히 ‘FC 바르셀로나의 우승’이라고 썼다.

그러나 아무리 바르셀로나 출신이 뛰어나다고 해도 동료와 마음을 모으지 않았다면 월드컵 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페인 대표팀의 골키퍼이자 주장인 이케르 카시야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상징인 선수다. 바르셀로나 동료들과 친분이 두터운 그는 두 집안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레알 마드리드 소속인 오른쪽 수비수 세르히오 라모스도 푸욜·피케와 완벽한 호흡을 과시하며 철벽 수비진을 구축했다.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의 ‘탕평 인사’도 큰 몫을 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영광을 누렸던 그는 대표팀에서는 오로지 능력으로만 선수를 평가하고 기용했다.

월드컵을 안고 개선한 선수단을 맞은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델보스케 감독을 향해 “스포츠맨십, 고결함, 능란한 경기와 팀워크의 표본”이라고 치켜세웠다. 사파테로 총리는 “월드컵을 쟁취한 것은 선수들이지만 (월드컵은) 모든 스페인 국민 몫이다. 모두가 힘을 합쳐 큰일을 해냈다”며 ‘화합’을 강조했다.

선수들은 뚜껑 없는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 시내 중심가인 콜론 광장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였다. 15만 명의 팬들이 스페인 국기를 흔들며 이들을 맞았다. 콜론 광장은 원래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에서 우승하면 전통적으로 카 퍼레이드와 우승 축하 파티를 하는 곳이다. 카스티야의 중심에 카탈루냐의 영웅들이 나타났고, 마드리드 시민들은 이들을 향해 환호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스페인 국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예전 같으면 돌을 맞았을 거라고 한다.

그래서 ‘스페인이 월드컵 우승을 통해 분열의 역사를 딛고 통합으로 가는 첫발을 내디뎠다’고 해석하는 언론이 꽤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앞서가는 얘기다. 마드리드의 한 시민은 “아주 작은 마취제로 잠시 우리의 문제를 잊게 만든 것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월드컵 결승 전날에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며 100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바르셀로나는 2005년에 ‘조세권과 법률 제정권을 갖겠다’며 독립 선언을 했지만 아직 중앙 정부에 세금을 내고 있다.

분열의 역사는 길고 생채기는 깊다. 하루아침에 치유될 게 아니다. 그렇지만 월드컵 우승이 스페인 국민의 자긍심과 자신감을 크게 높여준 건 사실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축구를 좋아하고 축구가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파테로 총리도 “월드컵 우승이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과 국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제 전문가들도 주류·의류·스포츠·레저 등 내수 산업이 살아나고 긍정적 심리 효과가 어우러져 경제위기 극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남아공 월드컵 우승 이후 스페인 국가 브랜드가 급상승하고 스페인 여행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페인 국민들 속에 ‘우리가 힘을 합쳤더니 큰일을 이뤄냈다’는 명료한 기억이 남게 됐다는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축구가 엄청난 일을 한 것 아닌가.



도움말 주신 분
김현철=한국외대 스페인어과 교수. 한국-스페인 문화교류센터 간사. 정남시=스페인 축구유학업체 베네스포츠(www.benesports.com) 대표. 정인성=FC 바르셀로나 한국 파트너 코리아이엠지(www.koreaemg.com) 해외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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