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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길 따라 야경 볼까 - 고궁 산책

중앙일보

입력


덕수궁의 밤
덕수궁 돌담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걸어도 좋은 곳이다. 특히 여름에는 가로수가 무성하게 자라 무성한 초록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근처 직장인들이 퇴근한 뒤라 조용하게 운치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풍경은 바로 담 너머에 있다.
시민에게 개방된 궁들은 여러 곳이 있지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야간 개장을 하는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그래서 경복궁이나 창덕궁은 바깥 조명만 설치한 데 비해, 덕수궁은 궐 내 건축물마다 은은한 조명이 쏟아져 내린다.
주변이 더욱 어두워지고 조명이 켜지면 건물은 숨을 쉬듯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날렵하게 하늘로 솟은 기와지붕과 당당하게 드러낸 기둥, 화려한 단청 색이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고종황제가 지내던 중명전 앞으로는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로 나란히 펼쳐져 역사책의 한 페이지가 고스란히 되살아 오는 듯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크고 높은 빌딩들이 호위무사처럼 궁궐을 빙 두르고 있는데, 그런 모습마저 덕수궁에 기품을 더한다. 야간 조명이 설치되어 있지만 달빛을 쪼일 수 있을 정도로 조도가 낮은 편이라 정원 숲이나 덕수궁 연못은 여름 곤충들의 오케스트라를 듣기에 좋은 장소다. 의외로 야간 개장에 관람객이 없으니 가장 느린 걸음으로 궁궐 곳곳을 걷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광화문의 밤
덕수궁만으로 아쉽다면 근처 사직공원을 거쳐 경복궁으로 이동하는 사직로를 걸어보자. 카페와 가게들이 즐비한 길을 조금만 지나면 경복궁의 돌담길과 만나게 된다. 비록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돌담길을 따라 설치된 조명과 조용한 거리 풍경이 고즈넉한 고궁의 정취를 자아낸다. 그렇게 다시 광화문 광장 쪽으로 빠져나오면 복원 중인 광화문과 자동차가 즐비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순신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앞에 나란히 서서 광화문 광장을 바라보니 광장이 모두 내 것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창덕궁의 밤
율곡로는 광화문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돌담길을 말한다. 가로등 외에는 따로 조명이 설치되지 않아 화려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하지만 항상 돌담길 하면 덕수궁을 떠올리던 이에게 창덕궁 돌담길이 주는 풍경은 좀 색다르다. 화려한 내부와 달리 담은 소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종묘에서 비원으로 넘어가는 돌다리와 그 아래 놓인 2차선 도로가 대조를 이루는 풍경이 좋았다. 평소 걷지 않던 길을 걸었다는 것도 좋았고 남들이 잘 찾지 않는 창덕궁의 밤을 지켜본 느낌도 좋았다. 예상대로 창덕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괜찮았다. 궁궐의 뒤안길은 여름 공기를 차분하게 만들었고, 사색하게 했고, 그 해 여름밤을 기억하게 했기 때문이다.

Information 덕수궁 관람 시간 오전 9시~오후 9시

기획_오지연 기자
사진_박유빈, 장진영 기자
레몬트리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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