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새 敵을 만들다 러 新나치 '정조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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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신문 국제면에서 '탈냉전'이란 말조차 찾기 어려운 요즘 영화 '섬 오브 올 피어스(The Sum of All Fears)'는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빠진 미국과 러시아의 격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급답게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각종 첨단 병기와 대규모 폭발신, 그리고 촘촘하게 짜인 서술구조가 결코 '장난'이 아니지만 어쩐지 영화 속에 쉽게 빨려들어가진 않는다.

2002년 오늘에 미국과 러시아가 국운을 건 핵무기 대결을 벌인다는 발상이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문화적 감수성의 차이일지 모를 일이다.

'공포의 총합'을 뜻하는 이 영화는 1991년 발표된 베스트셀러 작가 톰 클랜시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겼다. 그렇다면 할리우드는 출간된 지 10여년이 지난 이 소설을 왜 주목했을까. '붉은 10월''패트리어트 게임''긴급명령' 등 영화로도 대히트한 원작자의 명성과 재능이 큰 이유일 수 있겠다.

하지만 지난해 9·11 테러 사태 이후의 미국 사회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다는 시각이 더욱 설득력이 크다. 공산주의란 '공공의 적'이 사라진 미국에 지난해 느닷없이 들이닥친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자 공포였다.

'섬 오브 올 피어스'는 이런 미국 사회의 심리적 공황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5월 말 미국에서 개봉해 '스타워즈 에피소드 2'를 제치고 2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9·11 사태 이후 있을지도 모르는 잠재적 테러에 대비하자는 사회적 여론을 충실히 반영한 이 영화에 관객 또한 만만찮은 지지를 보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치곤 중급 규모인 6천8백만달러(약 8백16억원)의 제작비에 1억1천만달러(약 1천3백억원)의 수입을 올렸으니 '장사'도 잘한 셈이다.

'섬 오브 올 피어스'에 재현된 미국의 적은 신나치주의다. 공산주의·이슬람권에 이어 할리우드가 새롭게 변형된 히틀러의 파시즘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작품 속에선 신나치주의가 정교하게 분석되지 않는다.

단지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까지 동원하며 대대적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 매개체로 이용될 뿐이다.

플롯은 비교적 단단하다. 73년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분실한 핵탄두가 나치주의자에게 넘어가고, 나치주의자는 이 폭탄을 미국 볼티모어에서 열린 미식축구 개막전에서 폭발시킨다. 문제는 미국이 이 핵무기를 러시아가 폭발시킨 것으로 오해하는 것. CIA의 러시아 전문가이자 정책 연구원인 잭 라이언(벤 애플랙)이 사건의 진상을 파고들며 양국의 대재앙을 예방한다는 줄거리다. 명석한 판단력의 CIA 국장 캐봇(모건 프리먼), 우유부단한 성격의 미 파울러 대통령(제임스 크롬웰), 취약한 통솔력을 외부 침공으로 만회하려는 러시아 네메로프 대통령(시아란 힌즈) 등이 등장한다.

영화의 백미는 핵무기 폭발 장면이다. 엄청난 잿빛 버섯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또 핵폭풍에 헬기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전봇대가 무너지고, 자동차가 전복된다. 재난영화 '단테스 피크'의 화산 폭발장면과 비견된다.

미 국방부가 촬영에 적극 협조한 까닭에 미 대통령 전용기·스텔스 정찰기·블랙 호크 헬기·F-16 전투기·B-2 폭격기 등 최신 병기도 물리도록 구경할 수 있다.

제작진은 이스라엘이 망실했던 핵탄두가 사실은 미국에서 유출됐다는 것을 언급하는 등 정치적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일 뿐, 영화는 미국과 러시아가 '같은 인간'이라는 불명확한 사해동포주의로 마감한다. 양국 간의 긴박한 갈등에 힘을 너무 쏟은 까닭인지 '주범'인 나치주의자를 제거하는 장면도 싱겁게 끝난다. 필 올든 로빈슨 감독. 다음달 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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