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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2) 연대장의 피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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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그는 영어를 잘했다. 일본에서 외국어학교에 다니기도 했고, 평소에도 뭔가를 늘 열심히 배우고 익혔기 때문이다. 그는 손에 콘사이스 영어사전을 항상 들고 다녔다. 남과 대화하거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그는 늘 영어사전을 들여다보면서 단어를 익히고 외웠다.

그는 폭동 진압에 나선 군 책임자라는 점에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박 대령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주 성실해서 모든 일에 솔선해 모범을 보였다. 나는 중대장이었고 그는 내 부관이었다. 자연스레 많은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참 성실하면서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이다.

그런 품성에다가 아주 뛰어났던 영어 실력 덕분에 그는 미군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부산에 있을 때 함께 일했던 미군과도 사이가 좋았고, 그 뒤에 만났던 미군 동료도 그를 칭찬하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어처구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부대 내의 남로당원 습격 사건으로 죽었으니 그와 교분을 쌓았던 미군들도 사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윌리엄 딘 소장과 특히 친했다.

딘 소장은 6·25전쟁이 터진 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한군에 포로가 된 미군 장성이다. 앞에서도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추억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박 대령이 살해당할 때인 1948년에 미군 군정장관이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세워질 때까지 군정을 실시했다. 딘 소장은 그런 군정의 최고책임자였던 군정장관이었다. 말하자면 ‘총독’이었고, 최고의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제주 4·3사건의 진압에 나섰다가 부하들에게 암살된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고별식. 추도식은 1948년 6월 18일 연대본부가 설치된 제주농업학교에서 있었다. 박 대령을 아꼈던 딘 군정장관(왼쪽에서 둘째)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당시 제주 주둔 미 고문관이었던 찰스 웨슬로스키가 소장한 사진이다.

박 대령은 통위부 산하 조선경비대총사령부의 인사참모로 있다가 제주도 4·3사건 진압을 위해 현지로 파견됐다. 그 직전까지 중령으로 근무하면서 뛰어난 영어 실력과 행정 능력, 성실한 품성 등으로 미군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군정장관인 딘 소장이 그의 실력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둘은 인간적으로도 매우 교분이 두터웠다.

군정 시절부터 활약하다 건국 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등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미국 워싱턴의 의사소통에 간여했던 인물이 짐 하우스먼 대위다. 그 또한 당시의 박 대령을 극찬했다. 그는 내게 가끔 “박진경이라는 인물이 대단하다. 일도 잘하고 성실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박 대령은 제주도 사건에 투입되자마자 실력을 발휘했다. 강한 압박으로 폭동 세력을 몰아갔다. 그는 제주도 현지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내가 부관으로 데리고 있던 사람이 나보다 먼저 대령 계급장을 단 것이다. 그런 빠른 진급은 순전히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그가 죽었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지자 군대 내부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작전에 투입된 연대장이 좌익 부대원의 손에 의해 숨지는 사건은 보통 이상의 강한 충격으로 우리 군 수뇌부에 전해졌던 것이다.

윌리엄 딘(1899~1981)

군정장관인 딘 소장이 직접 제주도로 날아간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는 “내 손으로 박 대령의 시신을 수습해 오겠다”며 제주도로 날아갔다. C-47 수송기에 몸을 싣고 김포를 이륙한 그의 비행기는 바로 제주도를 향했다.

이어 그의 비행기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김포 비행장에서 그를 맞았다. 박 대령의 유해를 직접 싣고 온 딘 소장의 표정은 매우 침통했다. 그가 아꼈던 한국군 장교를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다는 개인적인 슬픔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딘 소장이나 우리 모두에게 한결같이 머릿속을 파고들던 생각이 있다. ‘도대체 좌익이라는 존재가 무엇이기에 부대장이 부하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는가’였다. 박 대령의 죽음은 작전 중에 희생을 당하는 군인의 경우와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 의미는 깊고도 컸다.

좌익이 어디까지 파고들어 왔으며, 그들은 장차 대한민국 건국 뒤에는 어떤 활동력을 보일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그들을 용인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우리 군 수뇌부와 미군 지도부의 뇌리를 맴돌았다.

폭동이 일어났던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그해 5월 10일 선거가 실시됐다. 같은 달 31일 제헌국회의 개원식이 있었다. 그리고 7월 14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런 즈음에 터진 박진경 피살 사건은 대한민국의 초석(礎石)을 이룰 군대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그냥 갈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우리 군 지도부의 생각도 그랬고, 옆에서 지켜보는 미군의 생각도 비슷했다.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 군대는 이미 조직 안으로 깊숙이 숨어든 좌익들에 의해 근간이 무너질 상황에 다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군이 출범하면서 조직에 들어서는 군인들의 정치적 입장을 제대로 따져 보지 않은 게 결정적 실수인 것 같았다. 어쨌든 좌익 사상을 지닌 인사들이 활개를 치는 군 내부를 제대로 살펴야 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병증(病症)의 환부(患部)가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박 대령이 현지에서 암살당하는 과정을 샅샅이 살펴보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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