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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24회 3.성장신화대우의몰락]워크아웃 통보에 김우중 "大宇車만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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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현대·대우의 구조조정 실적이 극히 미진합니다. 이번에는 이를 언론에 공개해 추가 자구노력을 유도하는 게 좋겠습니다."

1999년 4월 12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강봉균 경제수석은 열흘 후로 잡혀 있는 5대 그룹의 99년 1분기 구조조정 실적 점검회의를 앞두고 DJ에게 현대·대우를 공개적으로 압박해야 한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현대·대우의 실적을 확인한 DJ는 역정을 냈다.

"그렇게 하십시요. 손에 잡히는 성과 없이 재계 총수들을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정·재계 간담회도 연기하는게 좋겠소."

이틀 후 DJ는 월례 기자간담회에서 '폭탄 선언'을 한다.

"구조조정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에 넣을 수 있다."

다음날 강봉균은 노골적으로 현대·대우를 겨냥했다.

"5대 그룹 중 세 곳은 괜찮은데 두 곳이 문제다."

청와대의 서슬에 놀란 대우는 4월 19일, 현대는 23일 잇따라 추가 자구계획을 발표했다. 대우는 김우중 회장이 직접 나서서 힐튼호텔, 대우중공업의 조선부문, 대우차의 버스·트럭 및 엔진부문 등 '알짜' 자산을 팔아 9조원의 자구노력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34개인 계열사는 99년 말까지 8개로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예정보다 닷새 늦은 4월 27일 구조조정 점검회의가 열렸고 현대·대우는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날 회의를 고비로 김우중에 대한 DJ의 신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부 안에서도 '더 이상 김우중에게 대우 구조조정을 맡겨 놓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자리잡았다.

사실 금융감독위원회는 일찍부터 대우는 채권단 주도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99년 1월 23일 DJ가 삼성차-대우전자 빅딜의 조속한 합의를 촉구하기 위해 김우중을 만났을 때 금감위는 이미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DJ에게 올렸다. DJ에게 보고한 내부 문건에 '대우 워크아웃'이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그 요지는 이랬다.

'첫째, 대우는 워크아웃으로 처리해야 하며 추진은 기업구조조정위원회와 채권단이 한다. 둘째, 그룹은 ㈜대우와 대우차만 남기고 나머지는 분리·매각한다. 셋째, 해외 차입금은 국내 채권단이 해외 채권단과 협상해 처리한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회고.

"대우가 자력으로 부도 위기를 탈출하지 못한다면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법정관리는 대우의 모든 상거래 채권을 동결시켜 국가경제를 파탄시킬 수 있었다. 워크아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99년 1월께는 워크아웃의 틀이 어느 정도 정비돼 대우도 처리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 구도는 훗날 대우 워크아웃에 그대로 적용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보고서는 금감위 의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99년 1분기 구조조정 실적의 뚜껑을 열어보자 김우중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음이 드러났고 금감위의 해법에 힘이 실렸던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우측도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우그룹 전체를 법정관리에 넣는 '극약처방'이었다.

워크아웃이든 법정관리든 그룹이 산산조각나기는 마찬가지지만 워크아웃은 채권단이 마음대로 그룹을 수술할 수 있는 반면 법정관리는 법원 판결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시간을 벌 수 있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우측의 이런 시도는 스스로를 점점 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갔을 뿐이었다.

6월 30일.

삼성차의 법정관리로 삼성과의 빅딜이 깨지자 대우는 다시 부도 위기에 몰렸다.

99년 5·24 개각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이기호 경제수석(현 대통령 특보)의 회고.

"5월부터는 대우 워크아웃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다. 삼성과의 빅딜이 무산된 6월 말 강봉균 재경부 장관, 이헌재 금감위원장과 만나 '대우는 워크아웃이 불가피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대우를 바로 워크아웃에 넣을 수는 없었다. 워크아웃은 채권자의 75% 이상이 동의해야 하는 데 대우는 국내은행 빚 못지 않게 투신사와 해외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이 많아 당장 동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고심하고 있던 정부에 김우중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99년 7월 16일.

서울 힐튼호텔에 상주한 금감위 대책반과 대우측은 마지막 담판을 위해 김우중의 집무실인 21층 '펜트 하우스'에 모였다.

대우측에선 김우중·김태구(대우차 사장)·장병주(㈜대우 사장)가, 금감위에서는 이헌재·서근우(금감위 제3심의관)·김상훈(금감원 부원장)이 참석했다. 김우중이 즉석에서 이헌재에게 "단둘이 결판을 짓자"며 주위를 물렸다.

밖에서도 들릴 만큼 고성이 오갔던 두 사람의 대화를 양측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김우중:98년 말부터 6개월 동안 금융기관이 대우에서 6조원이나 빼가는 데 견딜 재간이 있겠습니까. 이를 원상회복하고 초단기 CP는 만기연장해 주십시요. 이를 위해 내 소유 주식과 계열사 주식 18조원어치를 담보로 내놓겠습니다.

이헌재:담보물의 가치는 10조원밖에 안됩니다. 이를 담보로 채권단이 4조원을 지원하도록 하고 초단기 CP는 만기를 6개월 연장토록 해보겠습니다. 대신 담보는 채권단에게 처분을 맡긴다는 동의서를 써주셔야 겠습니다. 그룹은 자동차와 관련 회사만 남기고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김우중:어차피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복안이 있으니 자동차 소그룹은 내게 맡겨 주시오. 자동차의 경영만 정상화되면 미련없이 물러나겠습니다.

이헌재:알겠습니다. 다만 구조조정 도중이라도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는 계열사는 바로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7월 19일.

대우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마지막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지만 '10조원 담보'의 약발은 사흘을 못 갔다. 발표 바로 다음날 "김우중 회장이 담보로 내놓은 재산은 모두 처분대상이며 구조조정이 끝나면 金회장의 지분은 모두 없어진다"고 한 강봉균의 발언이 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대우는 결국 채권단 주도로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증시를 덮치면서 23일 종합주가지수는 71포인트나 곤두박질했다. 사상 최대 하락폭이었다.

김우중은 속수무책이었다. 기자회견을 자청해 호소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채권단이 전면에 나섰다.

7월 27일.

제일은행에 '대우 구조조정 전담팀'을 만든 채권단은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채권단이 쥐겠다고 선언한다. 금감위도 대우의 회사채·CP를 처리할 특별대책반을 구성하며 워크아웃을 가로막고 있는 '지뢰'를 하나씩 제거해 가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던 김우중은 7월 28일과 8월 12일 두 차례 '해외 출장'을 나간다.

익명을 요구한 대우측 인사의 증언.

"金회장이 '나만 없어지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회장을 뒤쫓아 갔다. 런던 히드로 공항 근처 호텔을 찾아가 보니 金회장은 방을 정리한 뒤 약병 하나를 앞에 놓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간신히 회장을 설득하고 나자 정부측에서 '대우 관련 사법처리는 없을 것이며 자동차 소그룹의 구조조정을 맡기겠다. 그러니 8월 25일 정·재계 간담회에 참석해달라'는 메시지가 왔다."

8월 25일.

5대 그룹의 99년 2분기 구조조정 실적 점검을 겸한 정·재계 간담회에 김우중은 전경련 회장이자 대우그룹 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DJ는 먼저 김우중에게 말했다.

"김우중 회장은 최근 많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우가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강력하고 실천 가능한 구조조정 계획이 필요합니다. 대우의 책임자로서 구조조정을 마무리해 사회적 책임을 다 해주기 바랍니다."

김우중과 DJ의 만남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튿날 금감위의 긴급 호출을 받은 장병주 ㈜대우 사장과 정주호 구조조정본부장은 금감위로 들어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는다.

"대우는 워크아웃이 불가피하니 준비해 주십시오. 이미 대통령께도 보고했습니다."

당황한 장병주와 정주호는 그 길로 이기호 경제수석을 찾아가 "차라리 법정관리로 가겠다"고 버텨 봤지만 상황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날 오후 4시30분, 대우는 계열사 사장들의 도장을 찍은 워크아웃 동의서를 팩스로 금감위에 보낸다. 김우중의 도장은 한 계열사 사장이 대신 찍었고 이와 거의 동시에 대우그룹 워크아웃이 공식 발표됐다. 재계 서열 3위의 거함은 이렇게 침몰했다.

김우중은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10월 6일.

김우중이 기다리던 '원군(援軍)'이 한국에 왔다. 우즈베키스탄 카리모프 대통령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엔 동구권에서 둘째로 큰 대우차 조립공장이 있었다.

그는 DJ와 정상회담 도중 불쑥 김우중과 대우차를 화제에 올린다.

"김우중 회장과는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대우와 金회장을 도와주십시오."

DJ는 바로 답했다.

"정부도 金회장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동차 등 몇개 기업은 金회장이 운영해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DJ도 '김우중은 물러나야 한다'는 관료조직과 시장의 압력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대우측 한 인사는 이때 한 금융계 인사가 다음과 같은 정부측 메시지를 김우중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한다.

'金회장이 국내에 있으니 워크아웃에 애로가 많다. 잠시 외국에 나가 있으면 계열사를 잘 정리해 자동차 등의 구조조정을 맡기겠다.'

김우중이 이를 곧이 곧대로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10월 11일 유럽·아프리카 출장을 떠났다. 하지만 곧바로 삼일회계법인의 대우그룹 실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그는 십수조원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아직껏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채권단의 설명은 다르다.

오호근의 증언.

"99년 7월 19일 김우중 회장과 이헌재 위원장이 만났을 때 金회장에게 자동차 소그룹의 구조조정을 맡기기로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 자금난을 수습하지 못해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따라서 그 순간부터 구조조정은 채권단의 몫이었다.당시 워크아웃을 조금만 이해한 사람이라면 이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11월 1일.

김우중을 비롯한 12개 계열사 사장단의 일괄 사표가 채권단에게 전달되면서 대우 워크아웃은 비로소 본격 시동이 걸렸다.

대우 워크아웃 일지

◇1999년

▶1월 23일=DJ,김우중 면담 때 금감위 대우 워크아웃 처리 첫 건의

▶4월 14일=DJ,"구조조정 약속 안 지키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

▶19일=대우,추가 자구계획 발표

▶27일=DJ 주재 99년 1분기 구조조정 실적 점검회의

▶5월 5일=대우그룹 사장단 리츠칼튼 호텔서 법정관리 검토 결정

▶7월 16일=김우중과 이헌재 힐튼 호텔서 담판, 10조원 규모 담보 합의

▶19일=대우그룹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 발표

▶20일=강봉균,"金회장이 내놓은 담보는 처분대상"

▶23일=종합주가지수 71.7포인트 폭락

▶27일=채권단,대우 구조조정 주도권 행사 선언

▶8월 25일=DJ 주재 99년 2분기 구조조정 실적 점검회의

▶26일=대우 12개 계열사 워크아웃 발표

▶10월 8일=김우중,전경련 회장 퇴진

▶11일=김우중,유럽·아프리카 출장

▶11월 1일=김우중 회장 등 12개 계열사 사장 13명 사표 제출

◇2000년

▶1월 22일=대우 해외채권 협상 타결

▶3월 15일=㈜대우를 끝으로 대우 12개 계열사 워크아웃 방안 최종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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