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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패가망신 지자체’ 답사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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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스릴 시커의 여행은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일종이다. 아우슈비츠·다하우 수용소,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우리의 거제포로수용소처럼 비극의 역사 또는 재난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이다. 일본 홋카이도의 유바리(夕張)시에서 이뤄지는 ‘다큐멘터리 투어’ 관광상품은 그중에서도 좀 독특하다. 지자체가 파산에 이르게 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 관광이기 때문이다.

탄광도시였던 유바리는 석탄 경기가 꺼지면서 관광·휴양지로 변신하고자 했다. 유원지·박물관·호텔·스키장을 겁 없이 지어댔다. 자금이 바닥나고 부채가 산더미처럼 늘어났지만 분식회계로 버텼다. 마침내 2006년 7월 재정파탄을 선언했다. 재정이 살아날 때까지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해야만 국가가 도움을 주는 처지가 된 것이다. 유바리시의 공무원은 이후 절반 수준으로 줄었고, 세 곳이던 중학교는 하나로 줄었다. 내년에는 6개에 이르던 초등학교도 한 개로 통폐합된다. 다른 공공부문 예산도 깎고 또 깎았다. 시립병원도 민영화했는데, 지난 5월엔 심폐기능이 정지된 50대 남성이 구급차에 실려 이 병원을 찾았다가 진료를 거부당한 뒤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 시 전체가 시끄러웠다. 삿포로 등 인근 대도시 사람들이 유바리 시내 보육원·유치원에 무료로 페인트 칠을 해주거나 노인회관 청소를 해주는 등 ‘적선’도 잇따른다. 남의 까닭 없는 도움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인의 기질을 감안하면 정말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투어’는 그 와중에 발휘된 상술(商術)에서 탄생했다. ‘유바리 리조트’라는 민간회사가 운영을 맡아 2007년 7월 시작됐다. 부(負)의 유산이자 ‘실패학’의 살아있는 교재를 외지인에게도 팔자는 것이다. 일본 전국의 지자체 직원, 지방의원에서 교수·대학생, 중·고교생에 이르기까지 단체 여행객이 줄줄이 찾아왔다. 유바리시의 ‘파산’ 소식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덕분에 안양·공주시 등 국내 지자체 직원들도 여행을 다녀왔다. 어제 유바리 리조트 관계자에게 국제전화로 물어보니 “연 1000명 이상이 관광을 오는데, 그중 300명가량이 한국 등 해외 손님”이라고 했다.

엄밀히 말해 유바리시는 ‘파산’이 아니다. 유바리시의 현재 법적 상태는 ‘재정재생단체’다. 지난해 4월 개정된 ‘지방재정건전화법’에 따라 실질적자비율 등 4가지 지수를 측정해 정부가 부여한 부끄러운 지위다. 우리나라의 지자체들은 안전할까. ‘지방재정법’에 따라 행정안전부가 지자체들의 재정을 분석·진단하고 있다. 재정 진단 대상 단체에는 재정 건전화를 위한 갖가지 개선책을 권고할 수 있다. 그러나 성남시의 황당한 채무 지불유예(모라토리엄) 선언을 계기로 다시 부각된 지자체들의 방만한 돈 씀씀이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연말이 다가오면 꼭 멀쩡한 보도 블록을 갈아엎고, 깊숙한 산골에 스키장·호텔을 짓는 광경을 한두 번 보나. 그렇다고 저간의 경험상 지방의회만 믿을 일도 못 된다. 국민 한 명 한 명이 눈 부릅뜨고 내 세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감시해야 한다. 아니면 지자체 한 군데를 시범케이스로 폭삭 망하게 방치해 여행상품 하나 새로 탄생시키든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