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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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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선무를 떠올린 건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경기장에서 눈물을 흘린 축구선수 정대세 때문이었다. 재일동포 3세이면서 한국 국적을 지닌 그가 북한 팀으로 출전해 강적 브라질과 맞붙어 보여준 투지는 아름다웠다. 축구가 꽤 괜찮은 스포츠라고 생각해 왔지만 의외의 장면에서 그토록 사람을 고무시키는 자극제이기도 하다는 건 처음 알았다. 젊은 그들은 그렇게 천안함 사건으로 음울해져 있던 우리 가슴을 소나기처럼 두드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을 맞은 올해엔 6월을 정점으로 그 시절을 돌아보는 사진전이 줄을 잇고 있다. 국방부가 주최한 사진전 ‘경계에서 (On the line)’ 전시장인 대림미술관이 꽤 북적이는 까닭은 특별 도슨트(전시 안내인)로 연예병사 이준기, 이동욱씨가 나섰기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일흔 살 주명덕 작가부터 서른일곱 살 백승우씨까지 한국 대표 사진가 10명이 살아있는 전쟁을 포착한 관점은 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전전(戰前) 세대와 전후(戰後) 세대가 분단된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는 자리인 셈이다.

국방부가 이런 전시회를 기획한 이유부터 재미있다. 6·25와 군에 관한 이미지 자료를 찾아보니 예상 외로 콘텐트가 너무 없더라는 것이다. 전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언론에 소개된 저널리즘 사진은 많았지만 사진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분단국 풍경은 드물었다. ‘국경 아닌 국경’인 휴전선(休戰線)을 사이에 두고 이만 팔백팔 일째 대치해온 세월이 사진들 속에 가라앉아 있다.

참여 사진가들 중 한 명인 강운구 작가는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를 철책선 따라 하루에 주파하겠다는 계획으로 촬영에 들어갔다. 새벽 5시30분 고성에서 일출을 찍고 출발했으나 낯선 길 248㎞는 멀고 멀었다. 때마침 작전 나온 전차부대의 행렬에 가로막히기도 했지만 심리적인 거리감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결국 일몰은 다음 날 김포에서 마무리되었다. 그 김포 사진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강화도와 개풍군은 철책 경비에 나선 군인 얼굴로 이어지고 있다. 남과 북을 젊은 병사의 몸으로나마 이어놓은 작가의 마음이 읽히는 사진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퓰리처상 사진전’에서 관람객들 시선을 단연 끄는 사진은 ‘대동강 철교’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탈출한 시민들이 파괴된 대동강 철교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목숨을 건 피난길에 나선 모습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리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미술사학자 박은영씨는 이 사진을 중심으로 쓴 ‘한국전쟁 사진의 수용과 해석’이란 논문에서 ‘대동강 철교’가 오랫동안 한국전쟁에 대한 공공의 기억을 뒷받침하는 증거 이미지로 수용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지적을 내놓았다. 국사 교과서나 한국전쟁 관련 화보집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이 변화해 왔다는 연구결과다. 1980년대까지는 ‘자유 대한으로 넘어오는 북한 동포’ ‘자유를 찾아오는 피난민 대열’ 등 자유를 언급한 반면, 90년대 이후에는 간단히 ‘대동강 철교를 넘어오는 피난민들’이라고만 표기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이런 변화가 과거 정치에 대한 반성과 비판, 북에 대한 기존의 적대적 관점 완화 등의 움직임이 한국 사회에 확산된 결과라고 결론짓는다.

60년은 긴 시간이다. 남과 북 모두 이제는 전쟁을 겪은 세대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 해도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펼쳐진 휴전선의 그늘은 여일하다. ‘대동강 철교’ 사진 설명이 바뀌는 데만 40년이 걸렸다. 선무, 정대세 세대가 장년이 될 때쯤이면 광활한 만주벌판에 다시 설 수 있을까.

정재숙 문화스포츠부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