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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톈진 대고무역 정원영 회장 : '제 2고향 중국'에 봉사로 보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손에 땀이 흘렀다. 무모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쳤다.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30만달러짜리 봉제 기계를 들고 무작정 중국에 온 것 자체가 잘못이었나…."

봉제업자인 대고무역 정원영(鄭源榮·55)회장의 마음 속엔 자책만 가득했다. 세상 전체가 새벽녘 모깃불처럼 희미하게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재앙의 씨'는 계약서였다. 중국인 동업자와 서둘러 계약을 체결하면서 자구(字句)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은 게 실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계약서대로라면 자신의 기계가 동업자의 소유로 넘어가게 돼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서두른 게 유죄(有罪)였다.

한·중 수교를 4개월 정도 앞둔 1992년 4월, 鄭회장은 열심히 중국인 사업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서울 중랑구에 있는 봉제공장이 문을 닫게 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다락 같이 오른 임금과 재료비 때문에 한국에서는 도저히 타산을 맞출 수 없었다. 鄭회장은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 때 아는 사업가의 소개로 나타난 인물은 전형적인 화상(華商)풍의 소쇄한 신사였다. 鄭회장은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부터 체결하고 봤다. 맞춤한 파트너를 놓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패착이었다.

鄭회장은 암담했다. 비빌 언덕 한치 없는 이국땅인데 어디가서 하소연해야 하나. 그래도 이미 톈진(天津)항에 도착해 있는 기계가 동업자 공장으로 옮겨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일단 공장으로 들어가면 그땐 끝장이니까.

그는 계약서를 들고 조선족 통역을 앞세운 채 중국 공안과 투자유치기관 등을 찾아갔다. 변호사를 통해 소송 준비까지 마쳤다. 그러나 물길을 되돌릴 수 있는 희망은 반딧불 같았다. 鄭회장은 거의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소송에 매달렸다.

2년 가까이 피말리는 싸움이 계속됐다. 죽음 같은 세월이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중국 당국이 鄭회장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계약서 내용이 鄭회장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성됐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그 동업자는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됐고, 계약은 자연스레 취소됐다.

94년 3월, 마침내 '톈진 대고무역'이 문을 열었다. 독자기업으로 새 출발한 지 8년, 대고무역은 연간 3천5백만달러를 수출하는 탄탄한 기업으로 일어섰다. 나비처럼 화려한 변신이었다. 鄭회장의 봉제 기술이 워낙 탁월했던 데다 저렴한 노동력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영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한마디로 승승장구였다.

현재 톈진 시정부가 대고무역에 부여한 신용등급은 'AA'다. 우수 수출기업인 데다 탈세·밀수 등 범법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대고무역 제품이면 수출입 통관 절차가 크게 줄어든다. 관세 환급금도 늘어났다.

중국인에게 사기당했지만, 그 사기꾼의 나라 중국의 구원을 받은 鄭회장, 그는 중국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까.

"나는 중국을 고향으로 받아들였어요. 한국에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던 봉제 공장을 받아준 곳이 중국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겠지요. 저는 앞으로 중국에 봉사하면서 살 겁니다."

鄭회장의 짧은 말은 긴 행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 현장을 보자.

톈진시 외곽 징하이(靜海)현의 징하이 초등학교. 鄭회장은 이 학교의 육성회장이다.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것도 아니지만 그는 그냥 이 직함을 맡았다. 학교의 난방비를 대주는 일이 그의 몫이다.

톈진의 겨울 날씨는 고추 같이 맵다. 그렇지만 형편이 넉넉지 못한 대부분의 초등학교는 제대로 불을 땔 형편이 못됐다. 아이들 손이 새빨갛게 곱아들 수밖에 없다. 글씨가 써질 리 만무다. 鄭회장이 지핀 불은 아이들의 손과 발과 볼을 녹이고, 아이 부모들의 마음을 녹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인근 학교들도 난방비를 부탁해 왔다.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결국 징하이현 주변 모든 초등학교의 난방은 그의 몫이 됐다.

공장 주변 3백여 가구 주민들에게 온수를 대주는 것도 그의 일이다. 주민들은 언제든지 공장으로 들어와 온수를 받아간다.

난로와 온수뿐 아니다. 컴퓨터도 공급한다. 그가 한국 업체들로부터 열심히 중고 컴퓨터를 사모으는 이유다. 중고 컴퓨터는 간단한 수리를 거친 뒤 인근 초등학교로 옮겨진다. 새 컴퓨터를 사서 기증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는 거의 '과외 업무'처럼 이런 일을 한다. 인력 관리에서도 鄭회장의 봉사는 이어진다.

92년 톈진에서 공장 기계가 돌아가던 첫날, 근무 시작 전에 鄭회장은 전체 6백여명의 종업원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기에 밥 벌어 먹으려고 왔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도와주시면 저도 여러분을 힘껏 돕겠습니다. 서로 돕고 삽시다."

따뜻한 물결이 흘렀다. 모두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하나로 모였다. 그리고 鄭회장의 이 말은 어김없이 실천으로 옮겨졌다.

3년도 더된 일이다. 농번기마다 집단 휴가가 속출했다. 휴가 허용이 안된다면 아예 그만두겠다고 나서는 종업원들도 있었다. 사정을 알아봤다. 지나가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농번기, 집안에 일손이 달리는 게 이유였다.

鄭회장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트랙터 기증이었다. 5천만원을 들여 한국에서 트랙터를 들여와 현(縣)정부에 헌납했다. 지금도 이 트랙터는 징하이현 이곳저곳을 열심히 누비고 다닌다. 농번기마다 반복됐던 '소나기 휴가'가 사라진 건 물론이다. 요즘 鄭회장은 톈진시 교외 둥리(東麗)구의 조선족 학교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한다. 이 학교가 재정 파탄으로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나서부터다. 학생 1백30명이 거리 수업을 받게 될 판이었다.

"학생들 대부분이 외지에서 일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이에요. 학교에서 먹고 자고 생활해야 하는 형편이지요. 이 학생들에게 학교는 단순히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보금자리 같은 존재지요. 학교가 문을 닫으면 아이들은 허공으로 뜨게 됩니다. 그것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鄭회장은 4억여원을 들여 이 학교를 사들일 생각이다. 꽤 많은 돈을 번 鄭회장이지만 4억원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는 학생들 얼굴만 떠올리면 힘이 솟는다고 했다.

"전 물론 자선사업가는 아니에요. 그러나 베풀면 결국은 받게 된다는 게 제 믿음입니다. 비즈니스적으로 얘기한다면 봉사는 곧 투자지요. 설사 물질적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남을 위해 뭔가를 하면 그 과정에서 뭔가를 얻지요."

鄭회장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톈진=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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