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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제2부 薔薇戰爭제5장 終章:"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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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9면

상대등뿐이 아니었다.

시중 의종도 이에 반대하여 나선 것이었다.이에 대해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이 궁파의 딸로 왕비를 삼으려 하니 여러 신하가 극간하여 가로되 궁파는 매우 미천한 사람이니 그의 딸로 왕비를 삼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많은 신하들이 극간하여 반대하자 대왕은 입장이 난처하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김양을 돌아보며 물어 말하였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김양은 선왕인 신무왕과 문성왕 양대에 걸쳐 최고의 실력자이자,대왕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문성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양의 공을 추록(追錄)하여 소판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하였다. 소판이라 하면 권력서열 제 3위에 해당하는 직책이었고 창부령은 조정의 모든 재무를 담당하는 대신이었는데, 이는 다른 원로대신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문성왕은 김양을 시중 겸 병부령에 전임시켰던 것이었다. 병부령은 전 군사를 장악하는 핵심요직이었으므로 마침내 신라의 모든 권력은 김양에게 집중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전권을 장악한 김양에게 당나라에서도 예를 갖추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을 정도인 것이다.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빙문(聘問)하고,겸하여 공에게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을 제수하였다."

따라서 김양의 대답은 곧 법이었던 것이다. 문성왕은 잘 알고 있었다. 김양이야말로 자신과 장보고의 딸 의영간의 혼사를 중매하였던 월하노인이 아니었던가.

대왕이 묻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김양이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하였다.

"여러 대신들께오서는 장보고 대사의 근본이 미천한 해도인이니,어찌 그 딸로 왕실의 배후를 삼을 수 있을까 하여서 불가하다고 말씀하셨사오나 신의 생각으로는 무가무불가이나이다."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

이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문장으로 '가(可)도 아니고 불가(不可)도 아니다'는 뜻이었다.바꿔 말하면 '행동에는 중용을 지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뜻이었던 것이었다.

"선조 때에는 지철노왕(智哲王)이 양물의 길이가 1척5촌이나 되어 배후를 얻기 어려워 사자를 삼도에 보내어 구하였는데,한 사자가 본즉 개 두마리가 큰 북만한 똥 덩어리 끝을 물고 다투고 있는지라 한 소녀에게 물으니,대답하기를 이곳 상공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수풀 속에 숨어서 눈 것이라 하여 그 집을 찾아가 보니, 그 여인의 신장이 7척5촌으로 왕이 수레를 보내어 황후를 삼았다는 사실이 있습니다.그러므로 대왕께오서 장보고대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일도 불가한 일이 아니나이다."

김양은 일단 말을 끊었다.그의 말에 여러 대신들이 웅성거렸다.김양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오나 수풀 사이에 똥을 눈 여인도 결국 상공의 딸이므로 여러 대신들의 말처럼 미천한 해도인의 딸은 아닌 것입니다.그러므로 장보고대사의 딸을 맞아들이는 일도 역시 가한일이 아니나이다."

김양의 말은 애매하였다.

최고의 실력자인 김양의 답변이 모호하였으므로 그날의 어전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끝이 났는데, 그날 밤 김양의 금입택으로 상대등 예징을 비롯하여 지난 낮 어전회의에 참석하였던 모든 대신들이 모여들었다.이는 김양이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어 불러들인 것이었다.

"내가 여러 대신들을 이처럼 모신 것은 차마 대왕마마 앞에서는 나눌 수 없었던 가슴 속에 품었던 생각들을 흉금없이 털어놓으려는 때문이나이다.따라서 신이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양이 나서서 입을 열어 말하였다.

"신은 선왕 때 어떻게 해서든 장보고대사의 병력에 의지하여 원수를 갚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선왕께 아뢰어 장보고대사의 딸과 대왕마마와의 혼사를 맺기를 극간하여 이를 성사시켰나이다.따라서 약조한대로 장보고대사의 딸을 차비로 맞아들이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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