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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한 사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 글이 본인의 인격을 '과도하게' 훼손하지 않기 바란다. 지난 월드컵 축구에서 동료들과 내기를 했는데, 나는 이탈리아·스페인·독일과의 대전에서 세 번 모두 한국이 지는 쪽에 걸었다. 나의 베팅을 보고 경영학을 공부하는 친구는 전형적인 위험 회피(risk aversion) 행위라고 했다. 상대의 실력이나 전적을 쫀쫀히 따져보고 나서 그렇게 '비애국적' 도박을 한 것이 아니다. 한국이 이기면 돈 만원이 크게 아까울 턱이 없고, 혹시 지는 경우라도 노름에서 딴 소주 값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랠 작정이었다. 이 행복한 양다리 작전에 돌연 그 친구의 한마디가 재를 뿌렸다:"어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 돈을 따려면 남들이 걸지 않는 곳에 걸어야지." 아뿔싸 돈 딸 생각만 했지, 왕창 딸 생각은 못한 것이다. 이런 소견머리하고는! 결국 이탈리아와 스페인전에서는 돈을 잃고, 독일과의 시합에서는 땄는데 당첨자가 셋이나 되어 세 몫으로 가르니 소주 값도 모자랐다.

퇴로 없이 배수진을 치면

위험 회피 행위 가운데 포트폴리오(portfolio)기법이 있다. 재산을 예금·주식·채권·부동산 등으로 나눠서, 예컨대 주가가 떨어지면 채권 수익으로 챙기고 금리가 내려가면 부동산 거래로 벌충하는 식의 '위험 분산'기술이다. 이게 다 소심한 경제학자들의 쩨쩨한 궁리여서 그런지 도무지 화끈한 맛이 없다. 천하를 걸고 벌이는 도박 같은 기개가 없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천하를 걸수록 위험은 나눠야 진짜로 천하를 위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례로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호소는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을 질타하는 훈시로는 손색이 없으나, 승리가 아닐 때 죽음 대신 안전한 퇴각을 도모하는 것이 훌륭한 장수의 도리 아니겠는가? 충주 탄금대를 지날 때마다 나한테는 퇴로도 없이 달천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가 여지없이 패한 비운의 장군 신립이 떠오른다. 뒷날 명(明)의 원군 이여송조차 개탄한 그 패배로 저항다운 저항 한번 없이 도성이 왜군한테 떨어지고 만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이 위험 분산의 지혜가 자꾸 생각난다. 국정을 총괄하는 대통령쯤 되면-되려면-'전부 아니면 전무' 따위의 명쾌한 선택이 쉽지 않을 것이다. 성사되지 않은 노태우 후보의 '중간 평가' 공약이나, 5년 임기의 전반은 대통령제로 후반은 내각제로 번갈아 운영하겠다던 김대중(金大中)후보의 파기된 '공동 집권' 약속은 모두 정권 장악에 급급한 나머지 위험 분산을 고려하지 않은 실수로 기록될 만하다. 그 실패가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나라 발전을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면 하등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 일각에서 제기되는 개헌론은 그런 원론 수준의 개헌이 아닌 듯하다. 당이 공식 절차를 통해 선출한 대통령 후보를 낙마시키려는 '음모'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나는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적어도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필요로 하는 개헌이 현재의 세력 판도로는 거의 무망하게 보인다. 그것도 '작전'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으나, 개헌은 어느 특정 패거리만의 소관이 아니라 국민을 투표소로 불러내는 국민투표라는 절차가 있다. 그런 까닭에 '안되면 그만이고' 식으로 찔러나 보려는 배짱은 유권자를 노름판의 개평꾼쯤으로 여기는 아주 못된 습관이다.

대선후보 재경선 헷갈려

그 반대편에 노무현 후보가 있다. 후보 경쟁자 시절 그가 6·13 지방선거에서 부산·경남·울산의 어느 한 곳도 승리하지 못하면 재신임을 묻겠다고 외쳤을 때,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다. 승리 아니면 죽음의 각오! 암, 대선 후보라면 그 정도의 책임감은 있어야지. 그러나 그 당당한 재신임 결의(決意)가 당무회의 인준이란 '통과 의례'로 끝났을 때 적잖이 씁쓸한 기분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오는 8·8 국회의원 재·보선을 겨냥해 그는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선거 이전의 전당대회 개최는 안되지만, 월말까지 완전한 문호 개방으로 대선 후보를 다시 뽑아도 좋다고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재신임 경우처럼 재경선 역시 기술적·시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당 내외의 전망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또 한번 헷갈리게 된다. 민주당이 경선 연수원이 아닌 바에 공식 후보를 놔두고 새로 뽑자는 후보 자신의 제의가-비록 그것이 개헌과 분당을 막으려는 선수 치기라고 할지라도-옆에서 보기에 크게 딱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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