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오는 사람 없고… 있는 사람 나가고… 연구인력 가뭄 심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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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음향기기를 만드는 롯데알미늄㈜의 전자사업부 연구개발팀은 올 초 홍역을 치렀다. 졸업·입학·결혼 시즌인 지난 2~3월 성수기 출시를 목표로 지난해 봄 신제품 개발에 들어갔으나 연구인력이 모자라 시기를 놓칠 뻔했다. 이 회사는 25명인 연구원을 배로 늘리려고 지난해부터 여기저기에 광고를 내고 있지만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부산에서 선박용 전자장비를 만드는 케이티전기㈜의 기술연구소도 연구원 구하기에 비상이 걸려 있다.

임헌호 전무는 "숙소로 아파트까지 제공하겠다는데도 지원자가 없다"며 "일본 시장을 목표로 1년 전 시작한 선박용 종합 운항장치 개발이 지지부진하다"고 말했다.

기업체 연구소들의 인력난은 갈수록 심해지는 추세다. 이공계 기피로 인력이 줄어들고 연구원들의 이직이 잦기 때문이다. 쓸만한 연구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얘기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다. 기업체들은 신기술·신제품 개발에 적신호가 켜졌다며 우려하고 있다.

올 초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이하 산기협)가 1천개 민간기업 연구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민간연구소 중 64.1%가 인력문제를 가장 큰 애로점으로 꼽았다. 기업연구소의 애로사항을 처음 조사한 지난해 초보다 7.3%포인트 늘어나 인력난이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인력난 때문에 이공계인이 대우를 받기도 한다. 전자기기 중소기업인 ㈜삼진의 김효섭 인사팀장은 "연구원이 부족해 지난해에 신제품 개발을 포기하다시피 했다"며 "연봉을 30% 더주고 인력을 끌어들여 올해 겨우 연구소가 정상화됐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연수생 제도를 만들어 생산현장의 인력난을 덜어주듯 중소기업이 동남아 등지의 과학기술 인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연수생 제도를 정부가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원들의 잦은 이직도 인력난을 부채질한다. 한국 후지제록스 정보시스템의 이수익 시스템 엔지니어링 실장은 "요즘 젊은 연구원들은 입사 2~3년 뒤면 벤처 등으로 떠나는 게 보통"이라며 "5년 정도 지나면 얼굴이 반쯤 바뀐다"고 말했다. 시스템 엔지니어링실에서만 지난해 연구원 20명 중 5명이 벤처로 떠났다는 것.

산기협이 1백33개 기업 연구소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구원 이직률은 연평균 9.9%로 전체 상용직 근로자 평균(2.35%)의 네배가 넘는다.

연구원들의 직업만족도도 낮다. 산기협의 최근 조사에서 연구원 중 다시 직업을 택할 경우 연구원의 길을 걷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15.4%로 열명 중 두명도 안됐다.

이공계 졸업생도 줄고 있지만 당장 데려다 쓸 인재는 더더욱 없다는 불평도 나온다. 대학 교육이 산업현장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롯데알미늄 차인수 책임연구원은 "산업은 급변하는데 대학에서는 아직도 10~20년 전 교과서로 가르친다"며 "사람을 뽑아도 4~5년 훈련시켜야 겨우 실무를 맡길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은환 수석연구원은 "핀란드의 경우 대학에서 기업의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해도 학위를 준다"며 "우리도 산·학 협동을 강화하는 대학교육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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