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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출범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선 뭘 하나요 집단학살·전쟁범죄등 단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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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ICC)가 지난 1일 역사적인 출범을 했다는 얘기 들어보셨죠?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독일에 대한 전범재판 때부터 논의돼 왔으니까 반세기에 걸친 진통 끝에 태어난 셈이죠. 그러나 앞길이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네요. ICC의 존재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나라들이 있으니까요. ICC에 참여를 한다 안한다 말들도 많고요. ICC가 왜 생겨났고, 또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해요.

1. 우선 ICC가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요.

지난 반세기 동안 지구촌에서는 2백50여건의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어요. 이로 인해 8천6백만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요. 재산을 잃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짖밟힌 사람들은 무려 1억7천만명에 이른답니다.

무고한 시민들의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것은 분명한 범죄행위죠. 살인범과 도둑은 법에 따라 벌을 받지만 수십·수백만명의 목숨과 재산을 빼앗아간 중대 범죄의 책임자들이 처벌받은 적은 거의 없어요.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범죄를 처단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모순된 현실을 바로잡자는 게 ICC의 창설 취지랍니다. 한마디로 ICC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집단학살·전쟁범죄·반인도주의 범죄를 인류 공동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지구촌 재판소라고 할 수 있어요.

2. 이미 다른 국제재판소들이 있지 않나요.

유엔 산하의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ICJ)가 있어요. 하지만 ICJ는 기본적으로 국가간의 분쟁을 담당한답니다. 다른 국가에 피해를 끼친 특정 국가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거지요. 하지만 ICC는 신분과 지위의 높낮이를 떠나 범죄를 저지른 개인까지 처벌할 수 있어요. ICC와 비슷한 성격을 띤 기구로 국제형사법정(ICT·International Criminal Tribune)이 있긴 하지만 옛 유고 지역과 르완다에서 자행된 대량학살 문제만을 다루는 특별법정이라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어요. 이러한 특별법정을 상설기구화한 것이 ICC라고 보면 되겠네요.

3. ICC는 어떤 법에 따라 심판하나요.

1998년 로마에서 ICC의 판결 근거가 될 법령(로마법령)이 채택됐어요. 각국 대표와 수많은 전문가들이 현재의 국제법 규약과 인권 헌장 등을 기초로 수년간의 노력 끝에 만든 법이죠. ICC 판사들에게는 이 법조문을 아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모호한 경우에는 피고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자의적인 해석 없이 객관적인 국제 규범을 만들기 위해서지요. 로마법령에는 최고 종신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돼 있어요.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인권 규약에 따라 사형을 내릴 수는 없게 돼 있답니다. 벌금형이나 범죄로 취득한 재산에 대한 몰수형 등도 부과할 수 있습니다.

4.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를 처벌하지요.

한마디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사악한 범죄들입니다.

로마법령은 이를 크게 세가지로 나누고 있어요. 집단학살과 반인도적 범죄, 전쟁 범죄가 그것입니다. 집단학살은 어느 국가나 민족, 인종, 종교단체의 전부나 일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저지르는 범죄 행위를 말합니다. 살인은 물론이고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해당됩니다. 반인도적 범죄는 일정 지역 주민들을 겨냥한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환으로 저질러지는 범죄 행위로 정의돼 있어요. 표현이 조금 어렵지만 어떤 한 지역 주민들을 집중적으로 살해하거나 성폭행 또는 성적 노예로 삼는 행위, 인종차별을 하는 행위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집단학살과 반인도적 범죄는 전시나 평화시를 막론하고 처벌할 수 있습니다.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약에 기초해 판결합니다.

5. 최근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테러나 마약밀매 등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 건가요.

테러에 대해서는 국가간에 통일된 정의가 아직 내려져 있지 않아요. 마약밀매에 대해서도 일부 국가는 ICC에서 다뤄지는 걸 꺼리고 있어요. 그러나 많은 국가는 ICC가 테러와 마약밀매도 심판해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워낙 발생 빈도가 높고 파괴적인 범죄들이기 때문이죠. 이같은 우려를 감안해 98년 로마회의에서는 로마법령에 대한 재검토 위원회를 구성, 테러와 마약밀매를 대상에 포함시킬지를 논의하도록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답니다. 재검토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테러와 마약밀매가 ICC의 심판 대상에 포함될지가 결정되겠지요.

6. 재판은 어떻게 성립되나요.

먼저 국가별로 로마조약에 가입한 뒤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 합니다. 비준 절차가 끝나면 ICC의 사법권이 자동적으로 인정됩니다. 현재 1백39개 가입국 가운데 73개국이 비준을 마친 상태죠.

ICC의 사법권은 회원국 영토 내에서 발생한 범죄나 회원국 국적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효력을 미칩니다.

비회원국도 원한다면 ICC의 개입을 받아들일 수 있고요. 하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정하면 ICC는 관계국이 회원국이건 아니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어요. 단 이 모든 것은 ICC가 출범한 지난 1일 이후에 발생한 범죄에 한정된답니다.

7. 좋은 취지인 것 같은데 왜 반대하는 국가들이 있나요.

로마회의에서 미국·중국·이스라엘 등 7개국이 로마법령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어요. 이들 국가는 국가이익과 ICC의 활동이 서로 부닥치는 것을 우려하고 있어요.

중국은 티베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태도가, 이스라엘은 대(對)팔레스타인 정책이 ICC의 심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거든요.

현재 8개 분쟁지역에서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해외에 파병된 미군들이 저지르는 행위가 ICC에 제소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 국제전략을 수행하는 데 ICC의 존재가 걸림돌이 될 거라는 판단이 미국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은 국제적 압력 때문에 할 수 없이 로마조약에 서명했지만 의회의 비준을 미뤄 왔어요. 그러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아예 불참을 선언해 버렸답니다. 미국은 해외파병 미군에 대해 ICC가 면책특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평화유지활동 중인 미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하고 있어 국제사회의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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