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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도와주십시오.국민여러분, 21회 빅딜下 > LG, 대출중단 압력에 반도체 결국 포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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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반도체는 선친께서 일으키신 사업으로 저희에겐 가족과도 같습니다. 기술력이나 재무구조도 우수합니다."

1999년 1월 6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DJ에게 당시 현대그룹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반도체 빅딜'에 대한 그룹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구본무가 대통령 면담을 신청해 이뤄진 자리였고 배석자는 강봉균 경제수석 한 사람 뿐이었다.

DJ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구본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LG반도체는 아쉽지만 국가경제를 위해 내놓겠습니다. 이왕에 포기하는 것이니 지분 1백%를 모두 현대에 넘기겠습니다."

DJ는 반색했다.

"정말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정부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적극 돕겠습니다."

훗날 구본무는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LG가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마지막으로 직접 DJ에게 설명해보려 했다. 그러나 마치 거대한 벽에 부닥친 것 같아 결국 포기했다."

사실 구본무는 DJ를 만나기에 앞서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에게 "반도체를 포기하는 대신 데이콤을 인수하고 싶다"는 뜻을 비친 바 있었다.

반도체 빅딜이 지지부진하자 빅딜의 '원조'였던 TJ가 나서서 "반도체는 내놓고 대신 데이콤을 인수하는 게 어떠냐"며 구본무를 설득했고 구본무가 이를 받아들이자 TJ가 DJ에게 반도체 빅딜과 데이콤 문제를 한번에 풀자고 건의해 놓았던 참이었다.

이미 무선통신업에 진출해 있던 LG는 유선통신업도 겸하기 위해 데이콤을 손에 넣고 싶어 했지만 데이콤은 누구든 5% 이상 지분을 갖지 못하도록 한 법에 묶여 있었다.

어쨌든 이날 구본무의 DJ 면담은 98년 7월 4일 DJ와 5대 재벌 총수가 빅딜 원칙에 합의한 후 6개월여 만에 빅딜다운 빅딜의 첫 매듭이 풀린 자리였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 두가지-.

겉으로는 현대와 LG 어느 쪽도 원하지 않았던 이 빅딜은 왜 대통령 앞에까지 가서 매듭을 지어야 했을까.

또 완강히 버티던 LG가 막판에 물러선 데는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까.

이야기는 98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경로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 회장은 TJ의 지시에 따라 현대·삼성·LG그룹을 오가며 '삼각 빅딜'을 최종 종용하고 있었다.

삼각 빅딜이란 '현대는 LG에 석유화학을, LG는 삼성에 반도체를, 삼성은 현대에 자동차를 넘기는' 3자간 거래를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황경로는 각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에게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채근했지만 현대와 삼성은 끝까지 버텼다. 그러나 LG는 6월 9일 동의서에 사인을 한다.

LG는 왜 동의서에 사인을 했을까.

한 고위 관계자가 전하는 당시의 상황은 이렇다.

"우리는 황경로씨의 말만 듣고 삼성과 현대가 동의서에 사인할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리만 사인하고 말았다."

어떻든 LG가 동의서에 사인했다는 것을 전해 들은 김중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튿날 "빅딜이 임박했다"고 '천기'를 누설하기까지 했다.

비밀리에 추진해야 할 일이 알려지자 각 그룹은 즉각 이를 강력히 부인했고 그 바람에 삼각 빅딜은 다시 물 밑으로 가라앉지만, 이때부터 LG에는 반도체를 포기했었다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두달 뒤인 8월 7일.

정·재계 간담회에서 박태영 산자부 장관(현 전남도지사)은 반도체를 포함한 빅딜 대상 10개 업종을 전경련에 제시하면서 물 밑으로 들어간 삼각 빅딜을 의식했음인지 "반도체·자동차·석유화학은 꼭 포함됐으면 좋겠다"고 거듭 주문했다.

회의가 끝나고 김우중 전경련 회장대행은 4대 그룹 총수들을 옆방에 따로 불러 모았다. 자동차·석유화학·반도체는 어차피 빅딜을 해야 할 업종이니 5대 그룹 회장이 모두 모인 김에 원칙만이라도 정해 놓자는 것이었다.

김우중이 운을 뗐다.

"나라도 살리고 기업도 살자면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도체와 자동차는 이원화, 석유화학은 일원화가 어떻습니까."

나머지 회장 누구도 여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손병두의 회고.

"아무도 구체적인 그룹을 거명하진 않았지만 이날 자동차는 현대와 대우, 석유화학은 LG, 반도체는 삼성과 나머지 하나로 하자는 묵계가 이뤄진 셈이었다."

애초 삼성이 LG의 반도체를 인수하는 것으로 돼 있었던 삼각 빅딜의 구도는 이렇게 해 현대·LG의 공방으로 방향이 틀어졌던 것이다.

9월 3일 전경련이 7개 업종의 빅딜을 공식 발표하면서 LG와 현대의 반도체 빅딜 공방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두 그룹은 10월 7일에 가서야 전문 평가기관에 맡겨 어느 쪽을 경영주체로 할지 정하되 지분은 7대 3으로 나눈다는 데 가까스로 합의했다. 그러나 평가기관 선정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손병두는 양 그룹이 각각 5개씩 평가기관을 골라오라고 주문했다. 일치하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평가를 맡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측이 낸 리스트는 마치 상대방 답안지를 보고 쓴 것처럼 겹치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 3개씩 써내라고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시간만 자꾸 흐르자 손병두는 직권으로 미국 아서 D 리틀(ADL)을 평가기관으로 정했다. ADL은 손병두가 미국 유학 시절 근무한 경험이 있는 컨설팅회사였고 당시까지 현대와 LG, 어느쪽 일도 한 적이 없었다.

11월 10일.

두 그룹이 ADL을 수용함으로써 실사작업은 시작됐지만 두 그룹의 태도는 대조적이었다. 현대는 ADL이 요구하는 자료는 무엇이든 제공한 것은 물론 공장 내부 시설도 공개했다. 반면 LG는 공장 실사는 커녕 자료 협조조차 하지 않았다.

LG는 당시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면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반도체 빅딜 무용론'이 확산되기만을 내심 바랐다.

그러자 DJ와 정부는 LG를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나섰다.

"LG그룹이 반도체 빅딜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약속을 안 지키면 신규여신 중단 등 제재조치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12월 11일 서울 외신지국장 간담회에서 이헌재 금감위원장)

"5대 재벌 중 한 곳이 반도체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14일 CBS 창사기념 회견에서 DJ)

ADL도 평가작업에 급피치를 올렸다.

12월 24일.

ADL은 15개 평가항목 중 현대측 우세가 8개 항목이고 LG가 우세한 항목은 하나도 없으며 7개 항목에선 대등하다는 평가결과를 발표한다. 현대의 일방적 '판정승'이었다.

구본준 LG반도체 사장은 사흘 후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ADL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내겠다"며 강력 반발했다.

그러나 LG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12월 28일 오후.

반도체 빅딜에 관련된 15개 금융기관엔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모여 LG반도체에 대한 금융제재를 결의하라는 금감위의 메시지가 팩스로 전달됐고 몇시간 후 이들 금융기관은 "LG반도체의 신규대출을 중단한다"고 발표한다.

LG그룹은 곧바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열었다. 금융 제재를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점검해 보기 위해서였다.

익명을 요구한 LG 관계자의 회고.

"재무팀은 LG반도체만 금융제재를 받는다면 2년은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면 결국 금융제재가 전그룹으로 확대돼 그룹 전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처럼 LG가 흔들리고 있을 때 마침 TJ가 '데이콤 인수'라는 '당근'을 들고 나오자 LG는 반도체 포기를 결심했고 이렇게 해 DJ와 구본무의 면담이 성사됐던 것이다.

한편 구본무가 반도체 지분 1백%를 통째로 현대에 넘기겠다고 나오자 정작 당황한 것은 현대측이었다. LG가 통합회사의 지분 30%를 가져가는 만큼 큰 현금 부담없이 LG반도체를 인수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던 현대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LG는 인수 가격으로 6조5천억원을 제시했다. 현대측이 제시한 1조원과는 무려 5조5천억원이나 차이가 났다. 중재에 나선 전경련도 두손을 들자 오호근 사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이 나섰다.

오호근은 양측 대표를 불렀다. 현대전자에선 김영환 사장이, LG측에서는 강유식 구조조정본부장이 나왔다. 오호근은 1주일의 시한을 주고 양측에 최종 협상안을 들고 오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양측이 가져온 가격은 LG 4조9천억원, 현대 1조2천억원이었다. 다시 1주일의 시간을 더 주자 LG는 4조원 안팎으로 낮췄지만 현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오호근도 두손을 들고 만다. 이제 공은 완전히 현대측으로 넘어간 셈이었지만 현대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오비이락(烏飛落)'이었을까.

바로 이 무렵인 99년 4월 8일 금감위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을 발표한다. 반도체 협상이 한창이었던 98년 5~11월 현대중공업·현대상선이 현대전자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주가를 끌어 올렸다는 것이었다. 이 혐의로 금감위는 박세용 현대상선 회장과 김형벽 현대중공업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바로 이튿날 해외 출장 중이던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급거 귀국해 금감위의 중재안을 전격 수용한다.

중재안이란 'LG반도체 인수가격은 현대와 LG가 최종 제시한 가격을 산술 평균한 2조5천억원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반도체 빅딜은 이렇게 타결됐다.

99년 4월 27일.

5대 그룹 구조조정 실적을 첫 점검하는 자리였던 정·재계 간담회에서 DJ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지목해 말했다.

"LG가 결단을 내려줘 고맙습니다. 앞으로 무슨 사업을 하실 생각입니까."

구본무가 답했다.

"통신사업을 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데이콤을 인수할 계획입니다."

당시까지 정보통신부는 데이콤에 대한 지분제한을 풀지 않겠다며 LG그룹의 데이콤 인수를 공식 반대해왔다. 그러나 이날 LG의 데이콤 인수는 기정사실이 됐고 5월 6일 정통부는 데이콤에 대한 지분 제한을 풀어 준다. 이어 5월 20일 현대(현 하이닉스반도체)와 LG는 반도체 매매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한다. 반도체 빅딜로 현대전자는 삼성전자에 이어 한때 세계 2위 반도체 회사로 부상했다. 그러나 곧바로 불어닥친 반도체 경기 침체로 10조원의 빚을 안은 채 침몰해 현대그룹 해체의 '뇌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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