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3>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 22.이중 장부를 썼던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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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956년부터 59년까지 정부는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무역상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공매했다. 달러를 공매하는 날은 서울 남대문로 한국저축은행(현 한국은행 맞은편 제일은행 제일지점) 옥상에 2백여명의 무역상이 운집했다. 그곳에서 달러를 공매했던 것이다.

"달러당 얼마를 써내야 되는 거지?"

무역상들은 저마다 치열한 눈치작전을 폈다. 가격을 높게 써낸 순서대로 달러를 배정했기 때문이다. 대략 달러당 6백환에서 1천환 사이에서 써냈지만 달러를 많이 받을 욕심에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써내는 사람도 있었다.

"쯧쯧. 상투를 잡았구먼."

요즘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너무 높은 값에 사 손해를 보게 됐다는 뜻으로 '상투'를 얘기하는 것처럼 당시 달러 매입에도 그런 표현을 썼다.

나는 무역협회와 각종 수출조합에 친구들이 많은 덕에 정보가 빨랐다. 공개 입찰에서 손해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50년대에는 달러를 많이 확보한 무역업자가 수입에서 유리했다. 하지만 환율이 널뛰기를 심하게 해 애를 먹었다. 달러당 5백환 하던 환율이 2년도 안돼 1천환으로 오르기까지 했으니까.

환율이 급등하자 정부는 인플레를 걱정했다. 은행금리를 최저 수준에서 묶는 정책을 썼다. 사채 이자는 30%를 웃돌았다. 사람들은 금리가 낮은 은행돈을 쓰려고 줄을 섰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대출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배경이 든든하거나 담보가 확실한 대기업들이 대출 창구를 거의 독차지했다.

대출 커미션으로 5%는 기본이고, 많을 때는 10%까지 줘야 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래도 그게 훨씬 싸게 먹혔다. 커미션을 10% 떼어주더라도 은행 문을 나서는 순간 사채이자로 20%를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은행 대출은 그 자체가 돈벌이를 보장하는 특혜였다.

"담보를 맡기고 대출을 받아보시지요."

주변에서 이렇게 권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커미션을 주면서까지 은행에 줄서는 일은 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고 버는 돈은 내 돈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다짐을 했고, 지금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미국 정부의 원조자금으로 외국에서 기계를 사올 때에도 서류를 허위로 꾸미는 무역상들이 많았다. 실제보다 비싸게 산 것처럼 위장했던 것이다. 돈을 남겼다가 다시 달러를 가지고 들어와서 공장을 짓는 경우도 허다했다. 요즘에도 해외법인과 거래하면서 이전가격을 조작했다가 탈세혐의로 세무조사를 받는 기업들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아무개는 돈 한푼 안들이고 공장을 지었다."

이런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것은 약과였다. 귀한 달러를 해외로 가지고 나간 뒤 아예 귀국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환율이 가파르게 오르자 무역상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손해를 보는 무역상들이 속출했다. 달러당 6백환 하던 환율이 느닷없이 9백환으로 치솟기도 했으니까. 수입에 필요한 달러를 구입하는 부담이 갈수록 늘어나자 두배 장사도 남는 게 없다는 탄식이 나왔다.

"두배 반 장사는 해야 한다."

무역상들 사이에 이런 말이 공식처럼 통했다.

무역상들을 특히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세금이었다. 외국에 나가 물건을 살 때는 달러를 줘야 하고 국내 시장에 팔 때는 우리 돈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1년 사이에 환율이 엄청나게 오르면 별 실속 없이 매출액만 덩달아 불어났다.

무역상들은 그래서 이중 장부를 쓰곤 했다. 정부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역회사 세무장부가 엉터리라는 걸 뻔히 아는 정부는 평소에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세금을 매겼다. 이른바 '인정과세'를 했던 것이다. 나도 세금 때문에 이중 장부를 사용했었음을 고백한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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