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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워야 팔린다 … 프랑스, 자존심 버리고 ‘와인 혁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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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호 08면

프랑스의 대표적 와인산지인 보르도의 한 샤토에서 포도나무들이 7월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고급 와인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보르도=이택희 기자

프랑스 와인은 스트레스다.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다. 우선 복잡한 라벨이 그렇다. 보통 프랑스 와인 라벨에는 7~10줄이나 되는 글이 씌어 있다. 상당 부분 깨알같이 작은 글씨다. 이것도 모자라 어떤 것은 대각선으로 도장을 찍듯 써 놓은 글도 있다. 이에 비해 호주나 미국 등 이른바 ‘신대륙 와인’은 대부분 이름만 눈에 띄게 크게 써 놓고 품종과 빈티지 위주로 간단한 정보만 라벨에 담고 있다.

호주미국칠레산 득세한 세계 와인시장에 변화의 바람

프랑스 와인은 비슷비슷한 것도 많다. 외국인들이 보기엔 그게 그거 같은데 이름에 포함된 한두 단어 차이로 가격대가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소량 생산과 까다로운 품질관리 체계에 따른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자들이 구입을 꺼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만이 터져 나온다. 지난해 영국 와인 수입업자들은 프랑스 농업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 와인은 복잡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비슷한 이름을 가진 와인들이 품질 차이가 커 수입 리스크가 적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불만은 프랑스 와인에 대한 외면으로 이어졌다. 소비자들은 품질이 좋고 저렴하면서도 알기 쉬운 신대륙 와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해 프랑스 와인은 해외 매출이 19%나 줄면서 10년 전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이웃나라 영국에서는 호주·미국·이탈리아 와인에 이어 4위로 추락했다.

샤토 내 스테인리스 양조시설. 프랑스 샤토들은 이처럼 양조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오크통을 사용하는 전통 방식을 포기하는 곳이 늘고 있다.

프랑스 와인은 자국 내에서도 밀리는 모습이다. 파리 도심 콩코르드 광장 옆에 있는 특급호텔 크리옹. 이 호텔 식당인 레 장바사되르의 와인 리스트가 최근 조금씩 바뀌고 있다. 호텔 수석 소믈리에인 다비드 비로는 신대륙 와인을 포함시키고, 프랑스 고급 와인의 보증수표인 AOC(원산지 통제 명칭) 마크를 얻지 못한 와인도 끼워 넣고 있다. 오로지 품질만 기준으로 엄선한 결과다. 고급 프랑스 와인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추락하는 프랑스 와인의 현실 앞에서 뒤늦게 프랑스 와인 제조업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프랑스 경제 전문잡지 엑스팡시옹과 르피가로 등 프랑스 언론들이 최근 보도했다. 국제 경쟁에 자극받은 포도 재배자와 와인 도매상들이 품질과 마케팅, 효율성 제고를 겨냥하며 대반격에 나섰다는 것이다. 큰 틀은 그동안 고집해 왔던 ‘프랑스적 포도주 재배 전통’도 과감히 버릴 건 버리면서 산업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프랑스 언론들은 전했다.

가격 낮추려 고급 와인 품질 보증도 포기
프랑스 포도원의 혁명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프랑스적 와인’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운 세대들이 앞장서 전통적인 속박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있다.

우선 프랑스 고급 와인 품질 보증서인 ‘AOC’ 표기마저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AOC 딱지를 받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돈이 들지만 정작 소비자들은 라벨에 씌어 있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프랑스 와인 생산자들은 AOC 인증을 받기 위해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다. 포도밭에 주는 거름뿐 아니라 여름철에는 하루에 포도밭에 대는 물의 양까지 통제받는다. 이는 원가 상승 요인으로 생산자를 압박하면서 결국 프랑스 와인의 가격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AOC를 포기하고 두 등급 아래로 분류되는 ‘지방 와인(Vins de pays)’이란 딱지로 출시하는 샤토가 늘고 있다. 생산 단가를 낮춰 가격 경쟁력을 높이려는 의도다. 변신을 통해 신대륙 와인과 본격적인 가격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AOC를 계속 쓰는 경우에도 소비자들이 기억하기 쉽게 원산지 중심으로 이름을 통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레 프르미에르-코트-드-블레예, 프르미에르-코트-드-보르도, 코트-드-카스티용, 코트-데-프랑은 코트-드-보르도라는 이름으로 통일됐다.

프랑스인들만 알아보는 복잡한 명칭을 버리고 만국 공통어인 포도 품종 이름으로 승부를 거는 경우도 있다. 남서부 미디피레네주 로도(道)에 있는 카오르의 와인이 그 경우다. 보르도에서 재배되는 적포도품종인 말베크를 와인 이름으로 쓰는데 말베크가 미국인들로부터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품질이 낮은 ‘테이블 와인(Vin de table)’에 ‘프랑스 와인(Vin de France)’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테이블 와인’에 싸구려 이미지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고급 와인처럼 라벨에 품종과 빈티지를 함께 표기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생산·유통 총괄 ‘와인 메이저’ 등장
합병을 통해 프랑스 전역에 샤토를 두고 유통까지 총괄하는 ‘와인 메이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덩치를 키워 산업적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프랑스 포도원은 10만 개에 달한다. 평균적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소규모 생산과 유통에 따른 비용은 지금까지 경쟁력에 또 다른 부담 요인이었다.

포도주 제조그룹 아드비니가 선두 주자다. 이 그룹의 앙투안 레치아(43) 회장은 아드비니그룹을 와인 도매회사에서 매출 2억 유로(약 3040억원)에 달하는 와인 메이저로 변신시켰다. 아드비니는 프랑스 와인이 생산되는 모든 지역에서 강력하고 경쟁력 있는 상표를 갖고 있다. 카스텔도 보르도와 프로방스, 그리고 모로코·튀니지 등 해외에까지 포도원을 보유하고 있다.

여러 지역 포도원이 단일 상표로 고급 와인을 대량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각자의 전통을 중시하는 프랑스 샤토의 습성을 감안한다면 파격적인 일이다. 시장 지배력이 높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5년 전 설립된 와인 제조·유통회사 샤마레는 유명 프랑스 와인 생산조합 10곳을 합쳐 통일 상표를 쓰는 단일 품종 와인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렇게 만든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르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샤마레의 파스칼 르토다 사장은 파리마치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네 나라가 힘을 합쳐 만드는 비행기인) 에어버스와 같은 와인을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이들은 외국 소비자들이 원하는 새 와인 개발에도 신경 쓰고 있다. 남서부 아르마냐크에 프랑스에서 가장 큰 포도원 타리케를 갖고 있는 이브 그라사는 달콤한 와인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영국에서 반응이 좋다. 와인 체인 ‘메종 리샤르’의 코린 리샤르 사장은 “영국인들에게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우리 같은 프랑스인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체험”이라며 “그들은 타닌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과일 맛이 풍부하며 농도가 높으면서 우아한 와인을 원한다”고 말했다.

환경 보호 추세에 따라 ‘바이오 와인’ 생산량을 늘리고 유통에도 환경을 생각하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샤토-스미스-오-라피트의 주인 다니엘 카티아르는 캐나다 몬트리올까지 범선으로 와인을 운반한다.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14일 전후에도 멋진 돛을 단 배가 와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널 예정이다.

깊고 풍부한 포도주 향을 만들기 위해 전통적으로 써 온 ‘오크통(참나무통) 숙성’ 대신 양조 과정에 참나무 조각을 첨가, 속성으로 향을 내는 방법도 연구하고 있다. 프랑스 고급 포도주 제조업자들은 그동안 이를 편법으로 폄하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를 널리 사용하고 있는 신세계 포도주 제조업자들의 도전 앞에 그동안 금기시해 왔던 이 방법에 대한 연구에 돌입한 것이다. 잘게 썬 참나무를 원액에 넣으면 오크통에서 숙성한 것 못지않은 향을 짧은 시간 안에 얻을 수 있다. 포도주를 오크통에 넣어 나무 향이 배게 하려면 적어도 1년이 걸리지만 참나무 조각을 사용하면 석 달이면 충분하다. 비용도 오크통을 쓰면 헥토리터(100L)당 74유로(약 11만원)가 들지만 참나무 조각을 쓰면 5유로(약 7600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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