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악마 응원은 평등의 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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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저는 국가와 국가가 대립하며 벌이는 대형 행사가 부담스러워 월드컵을 아예 안 봤습니다."

귀화 한국인으로 2년6개월 전부터 노르웨이에서 살고 있는 박노자(30)오슬로 국립대 교수. 러시아인으로 모스크바대에서 한국고대사를 전공했고 한국 여성과 결혼한 뒤 귀화했다. 노르웨이로 가기 전에는 경희대 노어과 교수로 있었다.

그는 지난 25일 오후 7시 대학로에 있는 소장 학자들의 모임 '수유 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강의를 하고 있었다.

한국인보다 한국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그가 붉은 악마가 돼 응원했으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그러나 그는 붉은 악마가 보여준 민주적 색채엔 긍정적인 면이 많다고 분석했다.

"붉은 악마의 물결 속에는 지역색이 없었습니다. 학벌도 초월했지 않습니까. 다만 그런 평등이 축제라는 공간을 벗어나 학계·정치계 같은 공간에서도 이어질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서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남녀·연령 차별, 군사주의 문화의 잔재 등을 혹독하게 비판했던 그의 독설은 여전했다.

그는 "저조한 지방선거 투표율에서 나타났듯 붉은 악마를 배출한 20~30대가 한국 민주주의의 튼튼한 기반이 되기보다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하는 측면을 보여주었다"고 비판했다.

최근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는 책을 펴낸 그는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 등지에서 자국민이 행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묵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 좌파 정당마저도 제3세계 착취 문제는 건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후발 공업국가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부분으로 여기는 거죠. 그러나 유럽 기업인이 중국에 공장을 세웠으면 공기 정화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합니다. 그 첫 단계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부채 탕감일 수 있겠죠."

여름·겨울 방학 때면 서울을 꼭 찾는다는 박교수는 "동아시아 지식인들 가운데 노르웨이의 입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노르웨이에는 중국 루신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동양학 전공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서구 이외 지역을 근대화가 안된 주변부 정도로 파악하는 제국주의적 세계의식을 빨리 버려야 평등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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