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기개 이어가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플라톤의 『국가(The Republic)』 제4편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두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는 흔히 지적되는 욕망과 이성 외에 제3의 요소로서 '정신(Spirit)' 또는 '용기(Courage)'라는 것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스스로 놀란 길거리 응원

그리스어의 '듀머스(Thymos)'를 번역한 이 말을 보다 정확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기개(氣槪)' 또는 '기백(氣魄)'이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청년의 대화의 요체는 바로 개개인 영혼 속의 기개의 양상에 따라 국가의 양상이 좌우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었다.

월드컵 축구 경기를 지켜보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한 국민 누구나가 축구에서의 승리 못지 않게 바로 그런 승리를 이끌어 낸 우리 민초(民草)들의 단합된 모습과 우리 민족의 독특한 기개라고도 할 수 있는 '신바람'의 힘에 스스로 놀라고 감격했을 것이다. 월드컵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 중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우리 국민과 우리 민족의 기개와 기백, 곧 씩씩하고 진취성 있는 정신력이 시대상황에 맞게 발휘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혹자는 이 열기 속에 편협한 내셔널리즘의 맹아를 우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월드컵 한국 대표팀 자체가 세계화의 추세와 더불어 가는 '열린 민족주의'를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히딩크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반미주의의 폭발을 염려한 것도 기우(杞憂)임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을 외치고 "오~ 필승 코리아"를 노래하고 춤추는 군중 속에는 세계 각국에서 각기 자기 나라 팀을 응원하러 온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인파 규모와 열기를 지니면서도 질서정연한 '거리응원'은 우리의 성숙된 시민적 자질의 현시(顯示)임과 동시에 우리의 젊은 세대가 세계에 띄운 창조적 문화코드였다. 이번 월드컵 대회와 관련해 나타난 위험한 징후가 있다면 그것은 한국의 거리응원에 나타난 열기가 아니라 "미국인의 정신과 감정은 야구·농구, 그리고 미식축구와 더불어 있을 뿐"이라며 월드컵 축구를 폄하한 미국의 저명 칼럼니스트의 배타적 태도일 것이다.

혹자는 월드컵 축구를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전쟁'으로 빗대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유가 적합지 않다. 월드컵은 어디까지나 스포츠다. 따라서 지나치게 승패 자체에 국가와 민족의 명예를 결부시키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하지만 월드컵 경기에서 확인된 민족적·국민적 저력을 배타적이 아닌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사흘 뒤면 월드컵도 끝난다. 조만간 대회 기간 중의 흥분도 가라앉고, 열기도 식을 것이다. 많은 국민이 월드컵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무슨 재미로 살지 걱정하기도 한다. 재미없고 신바람 안나는 정치를 풍자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할 일이 많다. 축제는 일상을 위해 있는 것이다. 축제는 에너지를 방출만 하는 곳이 아니다. 다음 일상을 위해 새로운 에너지를 축적하는 장(場)이기도 하다. 그간 민초들의 무한한 '한국적 기개=신바람'의 가능성을 잠재우고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의 정치였다.

정치인들 본받아야 할 때

이제 정치인들이 나설 차례다. 국민을 지도하려 들지 않아도 좋다. 훈육하려 해서는 더욱 안된다. 오직 정치인들 스스로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하고자 하는지 비전과 목표를 정하고, 어떻게 실천하려는지를 보여주면 된다. 월드컵 대표팀에게서 감동받고, 히딩크 감독에게서 배운 것을 스스로 실천하면 된다. 정치는 전쟁하듯 싸움질만 하지 않으면 축구와 다를 것이 없다. 목표가 분명할 것! (국민과의)약속을 지킬 것! 규칙(법)을 지킬 것!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히 할 것! 학연·지연·혈연을 배제하고 능력 본위로 용병(인사)을 할 것! 그렇게 해서 경쟁(국정운영)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것! 등등…! 정치적 경쟁이 깨끗하고 치열해 재미있으면 일상 속 국민은 신바람이 날 것이다. 현대라고 해서,한국이라고 해서 정치인 중 영웅과 스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여야 정치인들은 "히딩크를 귀화시켜 대통령후보로 만들자"는 시중의 농담을 우스갯소리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