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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새콤달콤 이야기 한 바구니, 머리로 즐기는 과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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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과일 사냥꾼
아담 리스 골너 지음
김선영 옮김, 살림
424쪽, 1만6000원

미식가들에게 천국을 맛보게 해준다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엘 불리(El Bulli). 이곳의 주방장이자 예술가인 페란 아드리아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한 과일이 있다고 한다. 호주의 핑거라임이다. 손가락 모양을 한 이 과일 속에는 반투명한 동그란 알맹이가 가득한데, 그 맛은 샴페인을 처음 한 모금 마신 기분과 같단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는 과수원이 속속 만들어지기 시작했단다. 과거엔 과일을 퍼뜨리는데 지정학적인 요소가 중요했지만 요즘엔 요리사의 역할이 커졌다.

과일을 그저 흔한 간식거리 정도로 여기는 사람은 어쩌면 세상도 그렇게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책의 지은이는 “뒷마당이든 해외에서든 우리는 과일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자연이라는 숭고한 영역과 결합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신념 덕분일까. 과일이라는 주제 하나를 갖고 과학적·경제적·종교적·심미적 의미를 추적하며 역사와 문화까지 방대한 세계를 열어젖힌다. “브라질에서 과일이 나를 불러냈고, 나는 이 부름에 응답했다”는 그는 과일수집가·과일탐정 등의 사람들 이야기부터 오지의 이색과일을 찾아 떠난 기행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다채로운 지구촌 풍경을 담아냈다.

과일은 기쁨이며 사랑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천국을 과일로 가득한 공간으로 그렸고, 젊음과 불멸을 가져다주는 과일이 있다고 믿었다. 사진은 빈센초 캄피의 ‘과일 상인’(The Fruit Seller·1580). 잘 익은 과일들과 허벅지 위에 과일을 올려놓은 여성의 몸은 성적인 암시를 담고 있다. [중앙포토]

그에 따르면 과일은 인류에게 유혹, 달콤한 신기루,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영원한 천국 대신 사과를 택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곳은 무화과 나무 밑이었다. 자쿤족이나 세망족 등 말레이반도의 부족들은 죽은 영혼이 ‘과일섬’에 머무른다고 표현했다. “당신을 먹어도 되나요?” 남태평양 피지 주민들은 과거 코코넛을 쪼개기 전에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과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 “과일은 본래 에로틱하다”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때 서양 자두와 푸룬은 매음굴의 필수품이었고, 무화과는 바빌로니아 시대 때부터 정력 강화제로 이용돼 왔다. 굳이 이런 역사를 들추지 않아도 된다. 모든 과일의 시작은 꽃으로, “사랑의 결실이고 향기로운 성교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다.

생명력이 짧은 과일을 움켜쥐기 위해 인간은 맛을 희생하는 대신 화학처리·냉장유통·유전자조작 등 ‘파우스트적인 거래’도 마다하지 않았다. 현대인의 일그러진 초상의 한 단면이다.

지은이는 과일에 대한 지적 탐닉을 통해 “어떤 대상을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며 “과일에 대한 사랑이 곧 생명애에 대한 체험이며 다양성에 대한 사랑인 것을 배웠다”고 말을 맺는다. 엉뚱한 뒷얘기 하나. 지은이는 8년 간 사귀던 애인에게 결별을 당하고 난 뒤 과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일이 맛뿐만 아니라 지적 대상으로 그를 위로한 셈이다. 이름이 ‘아담’인 그에게, 이 책은 숙명이 아니었을까.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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