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포스트 월드컵 생각할 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너무 장하다. 두터운 유럽의 벽을 넘으며 유감없이 싸운 태극전사들에게 뜨거운 눈물의 갈채를 보낸다. 이번 2002 한·일월드컵에서 보여준 한국 축구의 대변신과 급부상은 세계의 찬탄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그 무서운 투혼은 월드컵 축구 72년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 기폭제가 되었으리라. 특별한 유전자의 초능력을 보는 듯한 신비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86년 이후 한국이 월드컵 예선에서 단연 강세를 보이며 본선 단골 출전국이 될 때마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보고서는 '미스터리'라고 적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축구가 맨땅을 벗어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프로선수 3백97명, 초등학생을 합친 등록선수라야 1만7천여명, 20년 된 프로리그는 현재 고작 10개 팀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대표팀의 국제경기에는 그래도 관중이 몰리지만 국내 프로리그의 스탠드는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부끄러운 현실을 보았다면 그들은 더욱 아연했을 것이다.

세계 언론을 놀라게 한 '붉은 해일'의 응원 구호는 '다이내믹''오 필승''업그레이드'로 요약된다. 바로 여기에 한국 축구의 키워드가 담겨 있다. 역동에서 환상으로 이어진 한국형 멀티 플레이, 지칠 줄 모르고 포기를 모르는 필승의 집념, 그리고 이제는 세계 일류로 뛰어오른 힘찬 아름다운 비상. 세계의 본보기가 된 이 키워드를 지키고 살려가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월드컵에서 나타난 한국 축구의 문화 코드는 한(恨)에서 흥(興)으로, 다시 혼(魂)의 문화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난 48년의 세월을 통해 한처럼 맺혀 있던 꿈이 두 단계, 세 단계를 뛰어넘어 더 큰 꿈을 만들었고 신바람의 놀라운 위력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한국 축구가 만들어낸 희망의 메시지의 한편으로 경고의 메시지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월드컵 축구 최고의 성공작으로 평가되는 이번 대회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과 함께 여러 과제를 남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개방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더욱 마음을 열고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히딩크 성공의 비결은 두말할 것 없이 인맥·연고를 배제한 실력 우선의 공정한 내부 경쟁 룰을 만든 것이라 하겠지만 또한 유럽축구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정보의 강점도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개막식 주제어에 담긴 그대로 세계와의 '소통과 어울림'은 한국 축구를 견인하는 힘이 될 것이다. 유망선수들의 해외진출로 무대를 넓히면서 부단히 경쟁력을 키우는 한편으로 놀랍게 상승한 국내 팬들의 눈높이를 고려해 국제 A매치를 자주 갖는 것도 주요 과제의 하나가 될 것이다.

또한 이번 월드컵의 대성공이 일과성 바람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국내축구, 특히 프로축구를 활성화하는 획기적인 개혁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당장 유럽이나 남미처럼 2부, 3부 리그, 또는 한 도시의 경쟁 팀을 두기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월드컵구장을 가진 도시는 프랜차이즈구단을 갖도록 유도하는 육성정책이 절실하다.

아울러 남북한 축구교류를 촉진하는 한편으로 일본·중국을 묶는 동아시아 리그를 창설하는 방안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적어도 유럽축구 방식의 시스템을 갖추려면 연중 정규 리그가 되어야 마땅하고 유소년 축구를 육성하는 일도 시급하다. 이러한 장기 비전 없이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의 경이로운 힘, 높아진 위상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함께 생활스포츠로 자리잡은 풀뿌리 축구에 활기를 불어넣어 그야말로 함께 즐기는 축구문화가 필요하다. 보다 승화된 카타르시스로 열광 뒤의 공허감을 메우는, 보다 발전된 축제문화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과제들을 풀어가는 포스트 월드컵, 애프터 프로그램이 하나씩 실천에 옮겨져야만 전국민의 광희(狂喜)와 세계인의 감동을 연출한 이번 월드컵의 성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