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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인 택 <기획시대 대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3면

요즘 충무로에는 웃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기획시대 유인택(47)대표도 그중 한명이다. 지난 3년간의 나락(奈落)에서 다시 살아난 기분이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대박을 터뜨린 것은 아니다. 중견 영화인으로서 자신을 되찾았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다.

무엇보다 "축하한다" "한번 만나자"는 전화가 부쩍 늘었다. 지난해만 해도 대부분 그를 피해다녔던 사람들로부터다. "이젠 유인택을 믿어도 될 것 같아. 상업영화도 만들 줄 아네"라는 격려성 인사도 많이 받는다.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씁쓸하다.

"내가 언제 무게 잡는 영화만 만들었나. 그래도 1990년대 프로듀서 중심의 기획영화 시대를 열었던 사람 중 한명인데"라며 애써 자위하지만 그래도 큰 걱정 없이 일을 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춰 온몸이 가볍기만하다.

효자는 최근 잇따라 개봉한 '일단 뛰어'(조의석 감독)와 '해적, 디스코왕 되다'(김동원 감독)다. 충무로에서 '퇴출' 직전의 그를 다시 현장에 복귀시킨 일등공신이다. 물론 아직 큰 돈은 만지지 못했다. 전국 관객 80만명을 동원한 '일단 뛰어'는 손익 분기점을 겨우 넘겼고, 최근 1백만명을 돌파한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월드컵으로 움츠러든 극장가에서 선전하고 있다.

지난 5월 초 '일단 뛰어'의 시사회장에 나타난 유대표는 심각했다. "75학번 제작자의 경륜과 76년생 감독의 패기가 뭉친 이번 작품을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직접 무대에 올라 "3년 전 '이재수의 난'으로 폭삭 주저앉았던 그의 재기를 주목해도 좋다"고 강조했다. 작은 키에 검게 탄 얼굴에서 일종의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그런 그가 불과 두 달 만에 환하게 달라졌다. 영화 두 편이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도 하곤 한다. 하지만 지옥 같았던, 즉 앞이 전혀 안보였던 지난 3년과 비교하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임에 분명하다.

흔히 영화는 도박이라고 한다. 한편의 흥행에 따라 제작자의 운명이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표의 경우는 다르다. 90년대부터 줄곧 영화 현장을 지키며 기획영화의 활성화, 한국 영화계의 법적·제도적 개선에 몰두해온 그가 '이재수의 난' 실패 하나로 투자자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던 것이다. 94년 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창립하고, 99년부터 남들이 꺼리는 협회장직을 맡아왔으나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영화판에선 이름이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에게 붙은 딱지는 사회파 제작자라는 것. 1901년 발생한 제주민란을 재조명한 '이재수의 난'(99년 당시로는 최대 제작비인 35억원)이 참패한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사회 변화를 못읽는 시대착오적 영화인이란 평가마저 있었다. 95년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그의 이미지를 운동권 제작자 비슷하게 고정시키는 쪽으로 작용했고, 80년대 몸담았던 마당극 운동과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활동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미스터 맘마'(92년), '너에게 나를 보낸다'(94년) 등 90년대 히트작을 기획·제작했던 그의 경력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회사 문을 닫을 것도 심각하게 고려했습니다. 돈은 물론 사람들도 다 떠나갔지요. 당시 벤처기업 붐이 일어 영상 자서전 사업, 사이버 캐스팅 사업 계획서를 만들기도 했죠. 그런데 지인들이 다 말리더라고요. 영화계의 신망이 남아 있는 만큼 회사 구조를 재정비하라는 것이었죠."

그는 주변의 소액 투자자를 모아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그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던 제작 시스템을 바꾸고, 주주의 이익을 우선 고려하는 영화사로 변신시켰다. 90년대의 목표가 칸영화제 대상 수상작을 만드는 것이라면 요즘은 할리우드 박스 오피스 1위 작품을 노리고 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시대가 변했어요. 영화계로 치면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제가 늦게 적응한 것이죠. 다행히 재능 있는 신임 감독들을 만나 다시 일어설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유대표의 e-메일 아이디는 yit2020. 20년 후까지 현장에 남아있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누구보다 '실패의 노하우'를 쌓은 만큼 앞으론 지속적·안정적 제작 구조를 구축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역대 한국 영화 가운데 최대 제작비인 1백10여억원을 투입해 8월 초 개봉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그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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