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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촌 여인들은 '더러운 외교'의 희생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신간 『동맹 속의 섹스』(원제 Sex Among Allies)는 양공주로 불려온 기지촌 여성들의 존재를 종속적 한·미관계의 국제정치 차원에서 다룬 문제작이다. 한국계 여성 정치학자 캐서린 문(38·미 웨슬리대 교수)의 이 책은 주한미군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했던 연인원 1백만명의 기지촌 여성들의 운명에 대한 학문 차원의 진혼곡인 셈이다. 다음 리뷰는 미군 사병에 의해 살해됐던 망자(亡者) 윤금이(1966~92)씨의 넋이 캐서린 문이 벌이는 진혼굿판에서 행하는 고백의 방식으로 꾸몄다. 책이 담고 있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장치다.

편집자

지하 속에서 불려나온 나 윤금이는 이 책을 눈물로써 맞았음을 고백한다. 책에 여러차례 내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거니와, 그러고 보니 내가 살해당하기 전후에 캐서린 문은 자료 조사차 한국에 머물고 있었던 셈이니 이 무슨 기이한 인연인가 싶다. 나를 포함한 양공주들의 슬픈 사연을 학문세계에 알리기 위해 캐서린 문이 1997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 책을 쓰고, 그게 다시 우리 말로 내 땅의 형제자매들에게 읽히니 이제 여한이 없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듯 나는 자궁 안에 콜라병이 꽂힌 채 살해된(44쪽) 못난 여성이다. 미국 정부의 공식 호칭은 '특수 엔터테이너' '비즈니스 우먼'이었던 우리들 모두의 아픈 사연을 누가 알랴! 캐서린 문의 다음 묘사에 나는 생전의 온갖 기억이 되살아나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바닥 중의 바닥'으로 취급당해 왔다. 외국인(양놈)과 살을 섞었다는 사실로 따돌림을 당해 왔고, 몸도 영혼도 더이상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게 했다."(22쪽)

그러나 나보다 2년 앞서 미국 땅에서 태어난 캐서린 문이 문둥이보다 못하던 우리들의 삶과 사연을 '한국 전쟁사의 증인'으로 복권시켜줬다. 또 한국전쟁 이후 1백만명에 달한 '기지촌 여인'들의 목소리를 전혀 새롭게 부활시켰다. 그렇다. 우리들은 저자의 말대로 일제시대 종군위안부 20만명과 같은 차원에서 거론돼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고마워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캐서린 문은 우리의 사연을 토대로 남자들의 성적(性的) 편견이 꽉 들어찬 이른바 먹물 학문과 세상의 패러다임 모두를 바꾸는 작업까지 진행해오고 있으니 내 비통함이 씻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우리들의 비극은 '한국인 누구라도 알고 있는 비밀'이 아닌가 묻고 싶다. 캐서린 문의 결론대로 기지촌 여성들은 한국정부에 의해서 주한 미군들의 성과 놀이 욕구를 채워주고, 그 충족된 욕구로 전투적 남성성을 발휘하도록 하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도록 사실상 조종돼 왔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 아닐까? 70년대 미국철수를 암시하는 닉슨 독트린의 등장을 한반도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파악한 한국정부는 '깨끗한 기지촌'을 위한 '정화'(공식 외교 용어로 사용됐다) 노력을 기울이며 미국의 환심을 사려 했다니 그렇다면 우리는 '더러운 외교'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세상에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은 어느 한 구석도 없다. 책 뒤를 보니 80년대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였던 자매 권인숙의 글이 내 속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남성들의 성욕 해결이란 다분히 본능에 가까운 문제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기지에서는 매춘을 허용하지 않는 등 한국에서와 전혀 다른 매춘정책을 세우고 있다. 우리가 만일 1백만 기지촌 여성들을 잊는다면 그만큼 우리의 시각이 남성 중심으로 편향돼 있음을 보여준다."(2백94쪽)

자, 이제 나는 뜨거운 눈물을 감추며 다시 명부(冥府)로 돌아간다. 바라건대 한반도의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들 기지촌 삶을 잊지 말아다오. 그것은 거대한 상징인지 모른다. '세계사의 시궁창'한반도 냉전에 피었던 한송이 야생꽃 말이다. 그 꽃의 아픈 사연을 오래 기억해주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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