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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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얼마 전 히딩크 감독의 고향 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그의 성장배경 등 개인사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 축구가 언제 그렇게 발전했느냐며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한 질문이 있었다. 히딩크 동상이 생긴다는 보도가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한국이 8강에 진출하면 동상뿐 아니라 '히딩크가(街)''히딩크광장'도 생길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자 모두들 놀라면서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구미(歐美)사람들은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독일이 자랑하는 대문호 괴테나 실러의 이름을 딴 길이 웬만한 독일 도시엔 다 있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남독일 산간마을에도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헌정돼 있다. 베를린의 경우 괴테 슈트라세(街)가 여덟 군데, 괴테 공원이 두 군데 있다. 실러 슈트라세도 일곱 군데나 된다. 이들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웬만한 음악가·과학자·철학자·화가·정치가 등의 이름은 모두 길거리에 바쳐져 있다. 최근엔 젊은 스포츠 스타들의 이름을 딴 길도 등장했다. 자동차 경주왕 미하엘 슈마허나 스키 점프의 마르틴 슈미트의 고향엔 그들의 이름을 딴 길이 만들어졌다.

길 이름만이 아니다. 학교나 연구소·공항·경기장 등의 이름도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쓴 곳이 많다. 얼마 전 총기난사 사건이 난 에어푸르트의 고등학교는 구텐베르크 김나지움이고,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독일 최고의 과학기술 연구소이며, 뮌헨의 공항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공항이다. 카이저스라우테른 구장에는 엊그제 타계한 '베른의 영웅' 프리츠 발터의 이름이 붙어 있다. 우리는 어떤가. 물론 서울에는 세종로·을지로·충무로·퇴계로 같은 위인들의 이름을 딴 길이 있긴 하다. 근자에 들어 서울에 소월(素月)길도 생기고 옥천에 지용(芝溶)로도 생겼다. 그러나 아직 너무 인색하다.

축구로 인해 사회 전반에 혁명적 변화가 진행 중인 지금, 길 이름 짓는 것도 발상을 바꿔 보자. 박지성로도 만들고 안정환길, 히딩크거리도 만들자. 아무래도 별도의 이름이 없는 광화문 네거리는 이번 기회에 아예 히딩크광장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영웅 만들기에 인색했던 과거를 털고 신화를 창조한 참 영웅들의 이름을 길에 새겨 길이 빛내자.

더하여 백남준길이나 임권택로, 조수미가 등이 생길 때 우리 사회는 그만큼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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