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진로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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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민주당 이인제(仁濟)의원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6·13 지방선거 결과 민주당이 참패하고, 노무현(武鉉)대통령후보의 정치력에 의문부호가 붙어 얼핏 보기엔 의원의 활동 공간이 넓어진 것 같지만 실상 그의 운신 폭은 적잖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의원은 "민주당이 다시 지역당으로 전락하게 됐다"면서 지방선거 결과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자신이 민주당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2000년 총선 때는 의석이 하나도 없던 대전·충남북에서는 8개, 강원도에서는 5개, 제주도에서는 2개의 의석을 만들어 냈음에도 이번 선거에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의원은 대놓고 후보의 책임을 거론하지 못하고 있다.

의원은 국민 경선에서 후보와 경쟁하다 중도에 사퇴한 바 있다. 경선 당시 의원의 대변인이었던 전용학(田溶鶴)의원은 "의원이 경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갔더라면 지금쯤 당내 입지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면서 아쉬움을 표시했다.

마땅한 다른 선택도 잘 안보인다. 지방선거 후 당내 일각에선 "노무현 후보-이인제 대표 체제로 난국을 돌파하자"는 주장이 있지만 의원은 펄쩍 뛴다.

그의 측근은 "의원은 후보가 유권자들의 정서적인 지지를 받을 수는 있어도 대통령감은 절대 아니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재경선도 우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고, 만의 하나 성사된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손'쪽에서 자신을 지원하겠느냐는 것이 의원 측의 판단인 것 같다.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김종필(金鍾泌·JP)자민련총재·박근혜(朴槿惠)미래연합 대표·정몽준(鄭夢準)의원 등과 '4자 연대'를 형성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현재로선 그야말로 '도상연습'일 뿐이다.

다만 의원은 지난 16일 서울 근교에서 JP와 골프회동을 했고, 朴대표나 鄭의원 등과도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의원은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 정치권에선 8·8 재·보선에서 민주당과 후보가 또다시 참패하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반 이회창 연대'를 기치로 의원은 물론 여러명이 함께 새 판을 짤 수 있다는 것이다. 후보 쪽에서 먼저 명분을 제공해 줄 가능성도 있다는 게 의원 측 판단이다. 예컨대 주류가 '노무현 당'을 적극 추진하면 의원도 거취를 결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의원 측은 "이 경우 당내에서 최소한 15명 정도의 의원이 함께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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