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한국축구 정말 잘하는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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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무래도 이건 기적이다. 우리 축구가 8강에 진출하다니. 안정환의 골든골이 터지는 순간, 근처 군부대에서 축포가 터졌다. 검은 하늘에는 흰 포연이 자욱했고 집집마다 터져나오는 환호성으로 골목이 흔들렸다.

뒤이어 뛰쳐나온 아이들은 어느새 미리 준비한 폭죽을 터뜨렸다. 전반전 내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침착하게 경기를 이끌어준 선수들이 믿음직스럽다. 잠시도 쉬지 않고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붉은 응원단은 아름다웠고, 후반전 종료 직전에 넣었던 설기현의 골도 깨끗했다.

한국 축구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명나고, 아름답고, 경쾌하고, 기운차다. 선수들은 어깨에 짓눌려 있던 부담감을 덜어냈고, 몸싸움에서 자신감을 얻었으며, 교묘한 심리전을 이용해 경기의 리듬을 조절했다. 무엇보다 온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응원은 얼마나 흥겨운지, 이즈음의 한국 축구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조차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한다.

나는 운동치(運動痴)다. '하기'는 물론 '보기'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데꺽데꺽 결정나는 승패와, 그것에 집착하는 분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던 날도 텔레비전을 켜둔 채 비스듬히 돌아앉아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말에나 귀를 기울이며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십분도 지나지 않아 어느 틈에 텔레비전을 향해 정면으로 앉고 말았다. 그것도 주먹을 꼭 쥔 채 입을 반쯤 벌린 자세로-. 축구에 문외한인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정말 잘하는구나!"

모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는 안정환은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느낌을 주긴 했다. (광고주와 광고제작자에게 안된 말이지만)한 분야의 프로페셔널을 데려다가 엉뚱한 분야에서 저렇게 박제를 만들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가 아무리 멋진 포즈를 취한다 해도 프로 모델에게 익숙한 내 눈에는 어설퍼 보이고, 그가 아무리 깊은 눈빛을 짓는다 해도 배우들의 끼 많은 눈빛에조차 내성이 생긴 마음에는 아무런 향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왜 프로페셔널 축구선수를 광고 모델로 쓰면서 운동의 생기나 신명 같은 것을 광고에 담지 않았을까 늘 의아했다.

누구든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광고에서는 박제 같던 안정환도 경기장에서는 비로소 생명을 얻어 비상하고, 모든 선수들이 넘치는 활력과 펄펄 뛰는 생기로 한껏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나는 바야흐로 한국 축구에 감탄했고, 히딩크 감독에게 감동했다. 그 감동과 아름다움은 미국 전, 포르투갈 전으로 갈수록 점점 커졌다.

대규모 거리응원단의 3분의1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하는 시선이 있는 모양이다. 그 시선에는 여성들이 안정환이나 베컴 같은 미남 선수 때문에 축구에 열광한다는 분석도 들어 있다. '운동치'에서 문득 한국 축구를 사랑하게 된 한 여성으로서 말하자면 이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금도 내가 즐기는 것은 축구의 룰이나 승패가 아니다. 그보다 녹색 구장 위에 선수들이 펼쳐 놓는 열정, 그 열정이 표출되는 방식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힘을 더하는 응원단의 신명, 마침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흔쾌히 녹아드는 축제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다. 그 축제 속에서 모두가 맘껏 광기를 발산하며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 것, 그 뒤끝에 희망과 역동성이 증폭되는 것을 확인하는 일, 그런 것들이다.

어쨌든 한국 축구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월드컵에서 첫 8강에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축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자발적 애국심마저 일깨워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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