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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끝> "일본病 앓지만 저력은 죽지 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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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김수길=약 두달간 준비해 한달 동안 연재했던 '일본 리포트'가 이제 막을 내리는군요. 올해 초에 다들 일본이 위기다, 위기다 할 때 어디 한번 일본을 제대로 들여다보자고 시작했던 것이 총 17회의 연재물이 됐습니다.

독자를 대신해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일본은 정말 위기인가" "일본은 과연 저대로 주저앉고 마는가" "왜 일본은 변하지 않는다고들 하는가"였지요? 물론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가면서 말입니다.

▶김정수=취재팀의 질문에 답한 일본은 '두 얼굴' 정도가 아니라 '여러 겹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한마디로 답을 구한다면 그간 나갔던 제목들이 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위기 속에서도 위기를 못느낀다'(1회),'제조업은 끄떡 없다'(5회),'금가기 시작한 종신고용 신앙'(11회),'개혁 이끌 오야붕이 없다'(3회) 등 말입니다.

이제 저더러 "일본이 어찌될 것 같은가" 얘기하라고 한다면 "한동안 부침을 계속하겠지만 지금의 전후(戰後) 일본을 일궈내며 50여년간 축적한 저력을 다시 발휘하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양재찬=다시 일어난다 하더라도 1980년대까지 누렸던 고도 성장은 어려울 겁니다. 일본은 이미 선진국이고, 더구나 늙었거든요.

과거 영국이 영국병에 걸렸던 것처럼 일본도 일본병에 걸렸는데, 일본의 꽉 짜인 사회·문화구조나 고령사회로 들어간 인구구조 등을 보면 70·80년대의 활력을 되찾지는 못할 겁니다. 게다가 영국은 대처 수상이 나와 영국병을 치유했지만 일본엔 아직 그런 리더가 나오지 않았어요.

▶이재광=리더십 문제와 함께 특유의 집단주의·평등주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사회를 '무라사카이(村社會)'라고 하듯 사회 운영 원리는 여전히 개인보다 집단에 가치를 두고 자유를 주기보다 통제하려는 집단주의입니다. 일본은 '매뉴얼 사회'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고용·재정·금융·부실정리 등에서 개혁이 지지부진하다고 비판받는 것은 그 집단주의를 깨기 싫고 또 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 속에서 위기를 못느끼는 것도 그간 종신고용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고, 임금도 거의 깎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재정적자는 커지고 기업은 멍들어도 말입니다.

▶김정수=그러나 일본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자유주의·개인주의·개방의 파고에 흔들리고 있어요. 종신고용에 마침내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 직업·저 직업을 전전하며 살고 싶은대로 사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고, 수입 개방으로 유통업체들은 쓰러져도 소비자들은 싸고 질 좋은 소비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제 일본이 더 이상 '비싼 나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저 자신 깜짝 놀랐습니다.

어쨌든 일본이 세계화 속에서 과연 자신들만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입니다.

▶신예리=그런 집단주의는 남과 다르게 튀는 것을 기피하는 문화·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들 입으로는 변해야한다 변해야 한다 하면서도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 일본 사회를 스스로 답답해하고 있고.

'튀어나온 말뚝이 두들겨 맞는다''긴 줄에선 튀어나오지 말고 그냥 휩쓸려라' 등의 말을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며 큰다는 사회에서 "자기 혼자 잘 되겠다고 사회 규범을 무시하는 벤처 기업인은 대우받기 어렵다"고 하는 기업인을 만난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재광=집단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공산주의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신예리=그래요. "일본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사람이 똑같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발상에서 탈출해야 한다"거나 "공산주의 북한에서 벤처기업을 한다는 게 상상이 가는가. 공산주의 일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기업인들이 있었습니다.

후지쓰의 야마모토 다쿠마 명예회장은 특히 일본의 교육에 주목, "과도한 교육 평등주의 때문에 우수한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 일본에서 가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게 교육"이라는 것이 평소 지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닛쿄소(日敎祖·일본교직원조합)에서 만났던 한 집행위원은 "학교에 경쟁주의가 판치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이가 더 커질 뿐 교육에는 시장원리가 도입되면 안된다"며 '교육 평등주의'를 신앙처럼 강조하고 있었어요.

우리의 교육 현실이 일본에서의 그것과 어찌나 비슷한지요.

▶김수길=교육만 아니라 끊임 없이 위기를 거론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산다'고 고집하더군요.

일본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막대한 축적'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만큼 쌓아놓은 것이 있으니 버티는 것이지요.'잃어버린 10년'이라지만 뒤집어 보면 그 10년을 버틸 수 있던 나라도 일본을 빼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일본은 재패니즈 스탠더드를 고집하며 천천히, 그러나 깊숙이 재정위기에 빠져들었고 결국 '서서히 더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라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반면 한국은 별로 쌓아놓은 것도 없으니 금융위기 한번에 휘청해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개혁을 할 수 밖에 없었지요. 한국의 개혁을 부러워하는 일본인들이 많은데 글쎄 우리가 자랑만 할 입장은 아니라고 봅니다.

▶양재찬=일본의 제조업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대기업들의 중국 진출 전략도 올초부터 달라졌어요. 경계해오던 중국을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의 마당으로 활용하자는 거지요. 이제 섬유·가전 만이 아니라 자동차 등도 중국에서 일괄 생산해 일본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 수출한다는 전략입니다. 중국에 진출한 일본 자동차 업체들의 현지 부품 조달률은 현재 50~60% 수준인데 이것이 90%에 이르면 일본에 역수출해도 채산을 맞출 수 있다고 보더군요. 요즘 일본에서 잘 팔린다는 현대자동차도 미리 대비해야 할 겁니다.

▶신예리=벤처와 IT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이니 벤처가 잘 될리 없고, 자기네 방식과 독점을 고집하다 출발이 늦은 IT는 IT 자체보다 기존 산업에의 IT 접목 위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ADSL(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은 먼저 깔았다지만 광(光)파이버망은 일본이 앞섰어요. 미래의 홈네트워크 구축 등 차세대 인터넷 분야에선 일본이 더 착실히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과 일본 중 어느 쪽이 IT 강국이 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김수길=이제 마무리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상황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점들도 많이 눈에 띄지 않았나요.

▶이재광=고령화 사회에서 건강보험·연금 등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지금부터 대비해야 합니다. 일본보다 빨리 늙어가는 사회이면서도 일본보다 재정구조도 허약하고 복지 수준도 떨어지는 건강보험·연금을 그냥 둔다는 것은 시한폭탄·터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국민소득 2만달러도 되기 전에 일본처럼 '늙은' 사회가 된다면 영영 선진국에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신예리=여성 문제도 너무 소홀히 하고 있어요. 왜 일본에서 혼자 사는 여성, 애 안 낳는 여성들이 늘면서 인구가 줄어들겠어요.여성들의 의식이 깨어가는 속도를 남성들이 사회가 쫓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취재 기간에 여러 곳을 다녔어도 임신해서 배부른 여성들은 한두 명 눈에 띄었을 정도였습니다.

▶양재찬=우리 중소기업을 조직화해서 일본 중소기업의 우수한 기술을 이전받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기술이 뛰어나지만 흑자도산하는 기업들을 끌어오자는 겁니다. 공단 자매결연 정도로는 곤란하고 정보제공과 투자유치를 함께 하는 상시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합니다.

▶김수길=미국이 일본과 가장 크게 다른 것은 미국이 이민사회라는 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은 늙지만 미국은 활력을 잃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일본이 경쟁력을 지닌 부문은 일찍부터 세계시장에 나가 경쟁한 부문이고, 그렇지 못한 부문은 국내시장에 안주해오던 부문입니다.

일본보다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한국은 이 점을 명심해야합니다.

▶김정수=동남아 권에서 일본의 힘이 자꾸 빠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지역경제에 무슨 공헌을 하느냐는 국제사회의 비난은 여전히 거세고요.

일본도 일본 몫을 해야 하지만,한국도 일본 등 주변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중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않은 나라는 이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됐습니다. 새 다자간 자유무역협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두 나라 모두 소극적인 자세로 있을 때가 아닙니다.

글 실은 순서

프롤로그(5월 16일)

일본, 추락하는가

1회(5월 16일)

위기 속에서 위기 못느낀다

2회(5월 17일)

이젠 '비싼' 나라가 아니다

3회(5월 20일)

개혁 이끌 '오야붕'이 없다

4회(5월 21일)

'돈부자' 발목잡는 3류 금융

5회(5월 22일)

제조업은 끄떡 없다

6회(5월 24일)

10년 불황 후폭풍 중소기업 줄도산

7회(5월 25일)

중국은 기회… 구조조정 불가피

8회(5월 28일)

불황 탈출 마지막 카드 엔저 쓸까 말까

9회(5월 29일)

변화 싫어,벤처도 싫어

10회(5월 30일)

뒤늦게 정신 차린 'IT 지각생'

11회(5월 31일)

금가기 시작한 '종신고용' 신앙

12회(6월 4일)

개인파산제 활용 '빚잔치 인생' 구제

13회(6월 5일)

사람 줄고 활력 잃고… 인구 비상

14회(6월 7일)

연금·건강보험 뒷돈 대다 정부·기업 죽을 맛

15회(6월 11일)

젊은층 취업 기피 일본 미래가 더 걱정

16회(6월 12일)

해뜰 날 기약 없는 먹구름 지역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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