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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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월드컵이 연일 흥행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가운데 지방선거 유세장은 유권자의 외면으로 썰렁하기 짝이 없다. 지방선거가 유권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하게 된 데에는 정치인들이 유권자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이렇게 유권자의 외면을 당할 만큼 후진적이라는 평가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주인노릇 제대로 못한 국민

해외에 나가보면 외국학자들은 한국의 민주화 속도와 발전에 경의를 표한다. 서구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데에는 적어도 몇 백년이 소요됐다. 유혈혁명을 겪은 나라도 있고, 공명한 선거를 정착시키기 위해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부정선거와의 전쟁을 수십년씩 치렀다.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40년도 안돼 1987년 민주항쟁을 성공시켰으며 그후 겨우 15년만에 여야간 정권교체와 국민참여 예비경선 등을 해냈다. 현직 대통령 임기 중에 대통령 아들의 비리를 밝혀내 처벌하게 된 것도 민주주의가 심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제수준에 비해 정치수준이 국민들의 기대수준에 못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면 당연한 결과다. 우리가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정치를 철저히 희생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치가 후진적이 될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은 무시한 채 정치를 비난만 하는 것은 누이동생이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 오라비 공부를 시켰더니, 성공한 오라비가 못 배운 누이동생에게 '무식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지금은 대리인인 정치인을 탓하기에 앞서 국민 스스로가 주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국민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점을 인식해야 한다. 첫째, 어느 국가에서나 정치와 불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워런 교수의 주장이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신뢰는 학연, 지연, 혈연 등을 매개로 내집단 사이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집단의 연대가 광범위하게 일어나므로 정치집단 내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정당은 정권쟁취를 위해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계층이나 지역간 차이와 갈등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거 후에는 모든 집단을 통합해야 하는데 선거 때 반대정당을 찍었던 집단으로부터도 신뢰를 얻는 것이 쉽지 않다. 이처럼 불신이 정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정치불신으로 선거를 외면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둘째, 국민이 주인노릇을 하는데 정치불신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무관심이다. 젊은 세대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무관심 때문이다. 월드컵을 비롯해서 정치보다 흥미롭고 짜릿한 놀이가 이렇게 많은데 정치에 신경 쓸 여유가 있겠는가. 또한 정치에 대해 체계적으로 듣고 배운 것이 없는 이들이 정치에 흥미를 갖기는 쉽지 않다. 축구 규칙이 어렵고 까다로웠다면 이렇게 많은 축구팬을 열광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문지식이 없는 유권자가 정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미국 대학에서는 대학신입생에게 의무적으로 미국정부론을 듣게 한다. 선거를 앞두고 투표참여 캠페인을 벌이는 것보다는 학교에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민주시민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직표 판치면 부패 불러

셋째, 제대로 된 주인역할은 주민자치에 참여함으로써 극대화된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러한 참여를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정당의 공천이 마음에 들지 않아 찍을 후보가 없다던 과거의 변명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다. 무소속, 시민단체후보, 진보정당 후보 등 다양한 대안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양시를 비롯해 몇몇 지역에서는 시민후보들이 의정활동을 제대로 못할 경우 주민소환을 받겠다는 각서를 쓰고 시민단체연대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번 선거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게 된다면 조직표가 승패를 가르게 될 것이다. 조직표로 당선된 사람은 앞으로 더 조직관리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고 부정부패의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주인이시여 그대는 기권을 택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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