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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투명성 과시'에 빠진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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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투명성 제고를 취지로 하는 제도들이 잇따라 도입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와 대선자금 파문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걸쳐 투명성을 높이자는 요구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개혁이라는 명분도 좋은 편이고 침묵은 묵시적 동의로 받아들여져 일부 개혁 법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큰 저항 없이 도입된다.

이렇게 도입된 제도가 현실을 바로잡고 모두가 지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문제는 현실과 제도가 따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과도한 규제에다 우리 법체계와 맞지 않거나 심지어 외국에선 이미 폐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제도까지 들여오고 있어 사회 전체가 마치 투명성 증후군에 걸려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특히 경제 부문에서도 기업들은 생존 차원에서 투명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정부는 이런 노력을 감싸주기보다 기업을 옥죄는 제도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집중투표제만 해도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폐기처분한 제도인데 우리는 1998년에 도입했고, 기업의 활용이 미흡하자 최근에는 출자총액제와 연계해 기업에 강요하려 하고 있다. 사실 이 제도를 도입한 곳은 칠레.멕시코.러시아.미국 등 4~5개국에 불과하다. 미국도 기업활동이 거의 없는 노스다코타주 등 일부에서만 시행하고 있다.

우리와 법체계가 다른 영미법 제도인 증권집단소송법은 현행 주주대표소송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에도 현실적인 애로는 고려하지 않고 성급히 도입했다는 지적이 많다. 막상 내년부터 시행하려니 수년 전에 발생한 회계상의 문제가 걸림돌이 돼 과거사에 대해 어떻게 면죄부를 줄 것인가를 놓고 고민 중에 있다. 더구나 피해 주주를 보호한다는 당초 취지보다 오히려 집단소송 전문 변호사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결과밖에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자금법 개정 또한 현실과 동떨어진 대표적인 사례다. 올 초 정치권은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으로 법을 개정했다. 우편을 통한 후원 요청만 허용하자 어느 의원은 1500장의 기탁 요청서를 발송해 겨우 40만원을 모금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대로 가다간 국회의원 대부분이 신용불량자가 될 것이란 말도 엄살이 아니라고 한다. 당시 경제계는 완전 선거공영제가 아닌 이상 기업후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 기부한도를 축소하고 처벌규정을 강화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주장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법 개정 1년도 안돼 다시 개정 요구가 나올 정도니 애초 너무 명분만 앞세운 대가일 것이다.

성매매방지법도 마찬가지다. 미성년자 성매매 또는 고리의 선수금을 주고 인질로 잡아놓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행위는 강력히 처벌해야 마땅하지만 이는 현행 윤락행위방지법이나 청소년보호법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인데 더 강력한 특별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입법과정에서 큰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

법 통과 이후 시행일인 9월까지 누구도 주의하지 않다가 막상 경찰이 단속을 하니 여성단체와 여성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법이 너무 경직됐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농림어업보다 비중이 크다는 이 산업이 하루아침에 붕괴돼 지역 중소상권과 내수경기에 큰 악영향을 주고 있다. 경제현실과 정책의 시의성을 고려하지 않고 명분만 앞세운 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행위가 주택가로 스며들거나 기형적 형태로 존속한다면 그때는 누가 책임지고 어떤 특별법을 또 내놓을 것인가.

아무리 명분이 좋은 법도 현실을 도외시해서는 부작용과 후유증을 낳을 수밖에 없으며, '절반의 성공'보다 '절반의 실패'가 더 크게 보여서는 성공한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현실과 괴리된 채 투명성을 과시하기 위한 무리한 입법이 계속된다면 국회와 정부의 입법 권위만 실추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