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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32>이젠 좀 버릇 없어도 된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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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호 05면

공연계 올 상반기 의외의 작품이라면 난 주저 없이 연극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꼽겠다. 작품은 칠순을 맞은 배우 이호재씨를 향한 헌정 공연이었다. 이런 헌정 공연이야 연극계에선 지금까지 몇 차례 있었다. 근데 이번 출연진은 유독 화려했다. 비슷한 연배의 전무송·김재건·윤소정씨 등이 출연했고, 성우 송도순씨가 처음 연극 무대에 선 것도 새로웠다. 예순을 훌쩍 넘긴 이 분들이 교복 입고 까까머리 고교생, 댕기머리 여고생을 연기하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설정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 대학로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정규수·이남희·권해효·이대연·길해연 등이 주루룩 나왔고, 특히 권해효·이대연씨는 학교 선생님으로 분해 회갑 넘긴 선배들을 혼내는 장면을 연출했다. 객석에선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더, 김철리·김광보·이성열·양정웅 등 연출가들이 매일 바꿔가며 카메오로 출연한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이호재라는 배우가 동료와 후배들로부터 얼마나 신망을 얻고 있는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그렇다면 결과물은? 이게 또 의외였다. 영 별로였다. 머리 희끗한 배우들이 고교생 분장을 하다 어느 정도 지나면 현실로 돌아올 줄 알았다. 아니었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고딩’으로만 남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얘기가 있지도 않았다. 몰려 다니고, 싸우고, 연애질 하다 커닝한다는 스토리 정도. 추억을 더듬는 게 뭐 문제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기왕 옛날 얘기 하는 거 칼날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고교생으로 분장해 향수를 자극한 명작을 많이 봐왔다. 그 작품들이 그저 “옛날은 참 낭만적이었어”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것도 알고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엔 학교로 상징되는 권위주의에 대한 고발이 있었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영화 ‘친구’는 또 얼마나 드라마틱하던가. 반면 ‘그대를 속일지라도’엔 향수 이상의 그 무엇이 없었다. 뚜렷한 주제 의식 없이 옛날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게 무슨 의미일까.

연극에, 대본에 문제가 있다는 걸 만드는 이들이 과연 몰랐을까. 아니다. 다들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본은 ‘불 좀 꺼주세요’를 쓴 중견 극작가 이만희씨가 썼다. 기획자는 “그래도 선생님께 의뢰해 어렵게 나온 대본인데 감히…”라며 이의를 달지 않았고, 배우들은 막상 대본을 받아들고선 “이게 뭐야”라며 뜨악했지만 출연하기로 약속한 이상 그냥 넘어가기로 했단다. 연출가 역시 지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연출했다.

‘선생님이기에’는 현재 한국 연극계가 가진 두 얼굴이다. ‘선생님이기에’ 후배들이 스케줄 빼고, 돈 별로 안 받고, 비중이 작아도 기꺼이 이번 연극에 참여했을 게다. 그건 이제 돈 맛을 알고, 악다구니가 넘쳐 난다는 다른 문화판에선 쉽게 볼 수 없는 훈훈한 풍경이다. 그러나 ‘선생님이기에’ 아무런 비판 없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건 전혀 프로답지 못하다. 아직도 팸플릿에 배역 비중이 아닌, 나이 순으로 배우 이름을 쓰는 게 연극판이다. 고루한 유교 문화가 한국 연극의 발목을 잡는 건 아닌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던가. 의심하고 비틀고 도발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거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연극은 아름다운 전통에 취해 정작 핵심을 놓치는 꼴이다. 그러니 후배 연극인들이여. 이 정도로 예의 바르면 됐다. 이젠 좀 ‘싸가지’ 없어도 된다.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성역은 없다'는 모토를 갖고 공연 현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더 뮤지컬 어워즈’의 프로듀서를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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