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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성범죄자 풀어주는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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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2일 낮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한 골목길. 승용차 한 대가 지나다닐 만한 평범한 골목이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금비(가명·10)·은비(가명·9) 자매는 이 길에 서면 소름이 끼친다. 지난해 7월 ‘나쁜 아저씨’를 만난 이후부터다.

두 아이는 집에서 50m 떨어진 곳에 사는 노모(60)씨에게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 노씨는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자매와 마주칠 때마다 몸을 더듬었다. 아이들은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갔다. 노씨는 9개월간 30여 차례에 걸쳐 추행을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 3월. 부산에서 여중생을 강간 살해한 김길태 사건이 벌어진 날, 금비 부모는 말문이 막혔다. TV를 보다가 “누가 너희를 만지는 건 나쁜 거야. 엄마한테 꼭 말해야 한다”는 말에 금비가 “어떤 아저씨가 우리를 계속 만져요”라며 울먹였다. 부모는 경찰에 신고했다. 노씨는 3월 말 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금비 부모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터졌다. 서울 서부지법 형사11부(부장 김현미)는 “노씨가 청각장애와 정신지체를 앓고 있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노씨가 자매를 성추행한 혐의는 인정되지만,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이어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원 측 관계자는 “검찰이 노씨를 기소할 때 일정 기간 시설에서 치료와 교화를 병행하는 보호감호를 청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부지검 오광수 차장검사는 “정신감정에서 노씨의 정신지체 정도는 가벼운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법원 판결은 의료진의 판단을 무시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노씨가 자신의 범행을 일부 부인한 점 등으로 볼 때 판단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검찰은 “법원이 무죄판결을 할 생각이었다면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어야 한다”며 1일 항소했다. 법원과 검찰의 다툼 속에 노씨는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피해를 당한 자매는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과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됐다. 골목길은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정선언 기자

▶성범죄 피해자 책임지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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