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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뒤늦게 정신차린 'IT 지각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나 난민(難民)됐어!"

후쿠오카에 사는 회사원 사도오 마미(30)는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얘기만 나오면 분통을 터뜨린다. 야후 재팬에 ADSL을 신청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서비스가 개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ADSL 붐이 한창인 일본. 그러나 사도오처럼 ADSL 신청 후 대기 중인 사람이 하도 많아 '야후 난민'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초 공기업 NTT가 정부 압력에 못이겨 회선을 개방하긴 했으나 타 업체의 ADSL 개통 공사엔 늑장을 부리는 탓이다.

일본의 ADSL 붐은 야후 재팬이 6천~7천엔씩 하던 월 이용료를 지난해 가을 2천엔대로 치고나간 것을 계기로 불붙었다. 그 결과 ADSL 가입자 수가 1년새 33배나 늘었다.

NTT가 종래의 ISDN(협대역 통신망·64kbps 속도)에서 광파이버망(1백메가bps)으로 곧장 간다며 고집만 안 피웠어도 진작 벌어졌을 일이다. 이래서 일본에선 NTT를 니혼고(일본어)· 나리타 공항과 함께 일본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3N'이라 부른다. 니혼고에 안주해 외국어 소통이 잘 안되고, 국제공항이라는 나리타는 도심에서 너무 먼데다 활주로가 한개뿐이라 얻은 불명예다.

일본이 뒤늦게 시작해 따라잡느라 열을 올리는 건 ADSL뿐이 아니다. 광대역 통신망이 늦게 정비되는 바람에 인터넷 관련 기반의 정비가 줄줄이 늦춰졌고 일본은 '정보기술(IT) 지각생'이란 수치스런 꼬리표를 달게 됐다.

"전세계가 IT로 먹고 살 거리를 만들었던 1990년대를 일본은 허송세월했다. 그런 점에서도 '잃어버린 10년'이란 딱 맞는 말이다"(다카하시 스스무 일본종합연구소 조사부장)

세계 제1의 경쟁력을 가진 굴뚝산업에 대한 안주,변화를 싫어하는 국민성, 규제 및 NTT의 독점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IT 분야에서도 특유의 '일본식'을 고집했던 것이다.

무선인터넷 'i-mode'로 유명한 이동통신 분야만 해도 일본은 아날로그에서 2세대 디지털 휴대전화로 전환할 때 독자적인 PDC(Personal Digital Cellular) 방식을 채택했다. 보편적인 미국식 부호분할다중접속(CDMA)이나 유럽식을 거부했던 것. 그러다 NTT 도코모가 지난해 3세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유럽식으로 바꿨다.

"세계 최초로 3세대 서비스를 선보인 것은 놀라운 성과지만 관련 투자를 새로 하느라 엄청난 돈과 시간을 낭비할 판"이라고 백낙권 MTI 시니어컨설턴트는 꼬집었다. 80년대 후반 아날로그식 고화질(HD)TV 표준을 고집하다가 미국의 디지털 방식에 밀리자 뒤늦게 디지털로 전환했던 쓰라린 체험을 일본은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IT 지각생' 일본은 결국 낙제생으로 전락할 것인가.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취재팀이 만난 전문가들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해 초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내놓은 'e-재팬' 구상 중엔 집집마다 광파이버망을 깔겠다는 'FTTH(Fiber to the Home)' 계획이 포함돼 있다.일부에선 모리 총리가 IT를 '이트'라 발음했던 데 빗대어 '이트 총리'다운 비현실적 발상이라고 비판도 한다. 그러나 김종신 e삼성재팬 사업본부장은 "일본의 광파이버 기간망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홈네트워크를 구축하려면 광파이버가 필수적이라 FTTH도 시간 문제다"라고 말한다. 일본이 가장 늦었다는 네트워크조차 세계를 곧 따라잡을 것이란 주장이다.

일본은 차세대 인터넷에선 오히려 세계를 선도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현재 사용중인 IPv4(인터넷 프로토콜 버전4) 체계는 최대 40억개의 인터넷 주소만 가능한 데 비해 차세대 인터넷인 'IPv6'는 무한대의 주소를 만들 수 있다는 게 특징. IPv4의 주소가 곧 고갈되는데다 앞으로 가전제품에도 인터넷 주소를 부여한다는 추세를 감안하면 IPv6로의 전환은 불가피하다.

일본은 일찍부터 정부와 기업이 똘똘 뭉쳐 IPv6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홈네트워크의 서버가 될 냉장고에 IPv6 주소를 부여한다든가, 인터넷이 가능한 자동차 실험이 한창이다. 정부는 세제(稅制)로 이를 밀어준다.

자회사인 nifty를 통해 세계 최초로 IPv6를 활용한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선보인 후지쓰의 구토 요시가쓰 경영전략실장은 "IPv4에서 IPv6로 가는 과도기에 양 체제에서 모두 쓸 수 있는 유닉스 서버와 라우터를 내놨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게다가 전세계 IT 산업의 '캐시 카우(돈벌이 되는 사업)'인 게임·콘텐츠 분야에서 일본의 입지는 이미 독보적이다. 불황으로 IT 기업들이 고전을 면치못하는 가운데 소니는 지난해 '플레이스테이션2' 등 게임 분야에서만 1조엔의 매출을 돌파했다.

IT 지각생이 모범생으로 돌변할 가능성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김정수·김수길·양재찬 전문기자

남윤호 도쿄특파원

이재광·신예리 경제연구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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