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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6>제101화 우리서로섬기며살자:45.월급은한곳에서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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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77년 미국 팀선교회 한국지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들이 운영하는 극동방송을 아세아방송에서 인수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팀선교회가 54년에 설립해 56년 12월 23일 방송을 시작한 극동방송은 KBS, CBS에 이은 한국의 세 번째 방송국이다. 하지만 적자가 늘어나는 데다 교리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던 모 교파의 한국인 경영진이 편향적으로 운영해 문제가 되고 있었다. 나는 미국 FEBC 본사와 협의해 극동방송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가지 준비를 거쳐 79년에 대한일보 건물에 있던 아세아방송 기자재를 극동방송이 세들어 있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 컴패션 건물로 옮기고 정식으로 방송사를 합쳤다.

극동방송을 인수해 사장에 취임한 나는 자립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선교 1백주년을 맞아 여의도광장에서 1백만 인파가 운집한 대집회를 개최한 한국교회가 무한정 지원을 받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지원을 받으면 본사의 간섭을 많이 받아 방송국 운영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나는 방송사에서는 목사이기 이전에 경영자가 되어야 했다. 당시 극동방송의 이사들은 대부분 교계 목사들이었다. 나는 거마비를 받아가는 목사에서 선교헌금을 낼 수 있는 장로로 이사진을 모두 교체했다. 나는 아세아방송 시절부터 방송사에서 월급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모금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떳떳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교회에서도 사례금을 받지 않다가 80년부터 받기 시작했다. 늘 몇 개의 단체 일을 맡고 있지만 나는 수원중앙침례교회 한군데서만 월급을 받는다.

당시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 대한항공 조중건 부회장, 엘칸토 김용운 회장, 신원그룹 박성철 회장 등이 이사로 영입돼 우리 방송사를 많이 도왔다. 나는 극동방송은 돈받으면서 일하는 곳이 아니라 돈을 내면서 일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놓았다.

많은 사람이 극동방송을 도와주었는데 특별히 벽산그룹 회장을 지낸 고 김인득 장로와 최순영 전 신동아 그룹 회장은 방송사 건물을 마련해준 분들이다. 당시 방송사 건물로 인수한 컴패션 건물은 업무를 수행하기에 너무 비좁은 데다 비가 샐 정도로 낡았다. 임시방편으로 지붕을 비닐로 덮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건물을 보수할 것인지, 다시 지을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많이 했으나 문제는 돈이었다.

그러던 중 김인득 회장의 아내인 윤현의 권사의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윤현의 권사는 "국내 전도사업에 미약하나마 최선을 다했지만 공산권 선교를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속히 건강을 되찾아 공산권 선교를 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고 위로하자 윤권사는 "소중한 일 하나를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후 윤권사가 유명을 달리했고 김인득 회장은 아내의 유언에 따라 5억원을 희사해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을 지어주었다. 스튜디오와 공개홀로 구성된 이 건물을 현의기념관으로 이름지었다.

그런데 건물이 완공된 지 얼마 안되어 벽산그룹이 세무사찰을 당했다. 무상으로 방송사 건물을 지어주었는데, 방송사 건축 건까지 세금에 포함되어 거액을 내게 되었다. 은혜를 입은 나로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국세청장이 안무혁씨였는데 국보위 때 사정위원장을 지낸 무서운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우리 방송사 부사장이었던 임경섭 해병대 예비역 소장을 보냈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당시 감사원장이었던 황영시씨와는 오래 전부터 테니스를 함께 치면서 가깝게 지냈던 터라 자연히 그의 비서와도 잘 알았다. 나는 황영시 감사원장의 비서에게 전화해 "안무혁 국세청장을 5분만 만나게 스케줄 좀 잡아 달라"고 당부했다. 비서끼리 스케줄을 조정하여 그 다음날 만남이 성사되었다.

안무혁 국세청장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자신은 교회 집사이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때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서울 국세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공정하게 처리하라"고 말했다. 다행히 우리 방송사를 무상으로 지어준 것이 밝혀져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었다.

당시 그 일로 나는 비서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해부터 매년 연말이면 비서들을 위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우리 방송사를 도와주는 분들의 비서들에게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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