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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아르헨티나 그리고 민주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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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월드컵 개막이 며칠 안남았음을 표시하는 전광판을 볼 때마다 나는 공연히 마음이 급해진다. 한국팀의 16강 진출을 기대하는 '붉은악마'의, 아니 온 국민의 함성을 들을 때마다 가벼운 흥분과 압력마저 느끼게 된다. 그것은 월드컵에 얽힌 나의 인연과 추억때문만은 아니다. 88올림픽이 그랬듯이 이번 월드컵은 단순한 축구의 큰 잔치가 아니다. 온 국민의 꿈을 실은, 그리고 나라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는 행사라고 믿기 때문이다.

메넴에 유치협조 부탁

9년 전 1993년 늦은 봄,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월드컵을 유치하자고 나섰을 때는 혹시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불가능한 꿈이 현실화되는데 익숙해진 시대에 살고 있었다. 민주화의 꿈과 노력이 87년 6·29 선언을 이끌어 냈고, 분단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열린 88올림픽이 냉전으로 지쳐버린 세계에 동서화합의 장을 제공했으며, 이듬해 89년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독일통일이 단숨에 이뤄지는 역사의 동력을 실감한 시대였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월드컵 유치에 겁 없이 뛰어들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유치활동이 수많은 고비를 넘으며 고전한 것은 오히려 당연했으며, 그 고비마다 예기치 않은 행운이 우리를 구출한 것은 잊을 수 없다. 특히 아르헨티나 메넴 대통령과의 만남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남미축구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축구연맹(FIFA)에서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브라질 출신의 아벨란제 FIFA 회장이 그의 막강한 힘을 일본쪽에 실어준 것이 우리에겐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1994년 초, 나는 정몽준 회장과 함께 아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을 찾아갔다. "브라질이 일본을 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찾아갈 곳은 당연히 아르헨티나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나의 직설적 부탁에 대해 메넴은 "말이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니라 안데스산맥 근처 자기 고향에서 주말을 함께 보내자고 우리를 초대했다.

이에 크게 고무된 나와 鄭회장이 그의 고향 농장 방문에 동행한 것은 물론이고 '메넴'이란 상표의 포도주를 넉넉히 음미했던 즐거움을 잊어버릴 수 없다.

그런데 그 아르헨티나가 지난 몇 해 동안 계속 경제적 불황과 사회적 혼란에 시달리더니 드디어 지난해 말부터는 국가파산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후진국이 개발도상국이 되고 중진국이 되며 급기야 선진국을 지향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일찍이 세계에서 손꼽는 선진국의 위치를 확보했으면서도 오히려 퇴화의 길을 걸어 급기야 파산을 맞게 되는 유일한 경우가 된 것 같다. 정치파탄의 무서운 결과다.

'울지마오, 아르헨티나'라는 노래가 정말 실감나게 들리는 딱한 사정이 됐다. 메넴과의 만남을 고맙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번 월드컵에서 이왕이면 우승후보의 하나인 아르헨티나가 우승할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극심한 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월드컵 우승의 낭보가 전해진다면 얼마나 큰 사기앙양의 특효약이 될 것인가!

개인적으론 아르헨 팀 성원

아르헨티나의 불운은 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지난주 마드리드에서 프레이 전 칠레 대통령을 비롯한 남미의 전직 대통령들과 민주화 과정이 당면한 어려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의 경우를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민주화 과정이 직면한 시련의 심각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들이 처한 공통의 과제는 단순한 경제성장이나 사회정의의 실현이 아니다. 어떻게 민주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느냐는 '통치의 위기(crisis of governance)'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남미 지도자들이 제시하는 민주화의 위기에 대한 진단 속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았다.

남미국가들 민주화 시련

성공적 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정당과 의회의 건전한 발전이 이뤄지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의회주의가 제도화되지 못한 민주정치의 공백 속에선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향수가 발동되게 마련이며 이는 곧 의회민주주의의 압살로 이어진 예가 수다하다.

그러한 지도자에 대한 향수는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사회평등을 단숨에 이룰 수 있다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들 때 발동되기 쉬우며 그 결과는 자유의 상실이란 것이다. 자유 없는 민주화란 원천적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악마의 유혹'에 빠진 지도자는 안정된 민주정치에 필요한 국민적 화합보다 국민적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이를 이용하는데 앞장서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권위주의 체제와 독재를 극복하기도 어렵지만 민주화 후에 의회정치를 안정되게 운영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결론이 널리 수긍되고 있다.

75년 스페인이 프랑코 독재로부터 민주정치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이래, 특히 90년대 초 소련의 해체와 냉전의 종식으로 1백여개의 국가가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을 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성공한 이들 국가의 대부분이 민주정치의 제도화 차원에선 여러가지 난관과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이러한 공통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상부상조하기 위해 민주화 과정을 겪는 여러 국가의 지도자들이 지난 5월 13일 마드리드클럽이란 협의체를 발족시키고 올해 말 퇴임하는 브라질의 카르도주 대통령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민주화를 위한 마드리드클럽의 법인체 등록이 예기치 않은 문제에 봉착했다.

유럽이나 남미에선 축구는 종교와 같다. 스페인의 경우 올해에 창단 1백주년을 맞고 지난주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통상 아홉번째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팀은 신성불가침의 위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레알 마드리드'축구팀의 공식명칭이 '마드리드클럽'으로 이미 등록돼 있어 다른 아무도 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국민은 자기들의 성공적 민주화가 세계적 민주화 물결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월드컵 개막을 며칠 앞두고 창립된 민주화를 돕는 '마드리드클럽'은 그 명칭을 사용해도 좋다고 흔쾌히 동의하였다.

2002년 월드컵에 대한 관심은 세계 곳곳에서 고조되고 있다.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도 한국의 경제나 정치보다 우리 대표팀의 전력과 컨디션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 정치의 고전(苦戰)은 아랑곳 없이 세계는 한국의 정치·경제 그리고 축구를 실력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한국인이 불가능한 듯한 꿈을 기어코 실현시키는 저력을 가진 민족이란 인상이 짙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축구의 잔치로만 의미를 축소시킬 수 없다.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씻어내는 계기로 삼고 우리 국민이 함께 꿈꾸는 미래가 어떤 것인가를 다듬어 보아야 한다.

<초대 월드컵유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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