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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잉글랜드 vs 아르헨티나 : 베컴 송곳 패스 오언 선제골 찔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1.마법의 양탄자

'눈의 도시' 삿포로에도 6월에는 비가 내렸다.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은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차창 밖으로 삿포로 도심을 굽어보며 '운명의 일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차분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경기 시작 45분 전, 그라운드에 첫 걸음을 들여 놓았을 때 대형 전광판에서는 이 경기장의 명물인 공기부양식 이동 피치가 며칠 전 폭 90m의 게이트를 통해 돔구장 안으로 운반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마법의 양탄자 같았다.

2.베론

아르헨티나 응원석은 은하(銀河)의 나라였다. 아르헨티나가 월드컵에서 첫 패권을 잡았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이 벌어진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타디움이 꼭 이랬다던가. 그때 베론은 세살배기 어린애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은데, TV 속의 그라운드를 누비던 마리오 캠페스와 다니엘 파사렐라의 모습은 선명히 되살아나곤 했다. 베론은 하프라인 너머에서 등을 돌린 채 스트레칭에 몰두하고 있는 사나이를 넘겨다보았다.

'드디어 만나게 됐군, 데이비드 베컴.'

발뼈 골절로 월드컵 출장이 불투명하다던 잉글랜드 최고의 마술사가 기어이 삿포로에 등장한 것이다. 베컴과 베론, 누구의 마법이 통할 것인가. 담큰 베론도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경기장에 울려퍼지는 아나스타샤의 월드컵 공식 주제가(Boom)가 귀에 거슬렸다.

'이럴 땐 피아졸라의 탱고가 제격이지. 리베르 탱고가 어울리겠어'.

베론은 베컴에게서 앵글로 색슨인 특유의 냉정함 속에 감춰진 야심을 보았다. 발목이 부러져도 베컴은 승부를 포기할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동안, 베론은 분명 보이지 않는 차별을 느꼈다. 이길 수 있을까. 베론은 다시 한번 베컴을 바라봤다. 빛처럼 빠르고 소리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베컴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그림자를 베론은 놓치지 않았다.

3.베컴

'빌어먹을. 발등이 또 쑤시는군.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을까'.

축구화 끈을 조이며 베컴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시아의 날씨도 천차만별이군. 서귀포에선 그렇게 좋았는데…'.

힘들 것이 분명한 일전을 앞두고 베컴은 불현듯 일본에 동행하지 못한 옛 동료들이 그리웠다. 특히 고란 에릭손 감독이 탈락시킨 테크니션 스티브 맥매너먼이 아쉬웠다.

'맥매너먼과 함께라면 짐이 훨씬 가벼울 텐데'.

베론이 두렵지는 않았다. 맨체스터에서 베컴은 베론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았다. 강하고 정확하지만 어쩔 수 없이 피가 끓어오르는 남미 사나이. 큰 경기일수록 격한 성격은 단점이 되는 법이다. 4년 전 베컴이 저지른 실수를 베론도 되풀이할지 모른다. 생테티엔 기샤르구장에서 벌어진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서 베컴이 깊은 태클을 한 디에고 시메오네에게 발길질을 했다가 레드 카드를 보고만 그 순간, 잉글랜드의 운명도 끝장이 나버렸다. 베컴은 베론에게 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화력(火力)은 부러웠다. 메스처럼 정확하게 공간을 파고드는 골 사냥꾼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힘과 유연성을 겸비한 에르난 크레스포, 찬스에서는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 아리엘 오르테가…. 이 가운데 한 선수만이라도 내 편이었다면! 반면 아르헨티나 미드필더들의 수비 표적은 오직 베컴, 베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4.Falkland in Sapporo

그러나 축구는, 더구나 상대가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라면, 전력만으로 결판이 나지 않는다. 진정한 승부는 축구장이 아니라 가슴 속에서 이뤄진다. 두 나라 사이에는 분명히 세대를 거듭하며 사무친 악연(惡緣)이 있다. 82년의 포클랜드 전쟁은 양국 관계를 최악의 국면으로 몰고 갔다. 그때는 아르헨티나가 졌다. 그러나 축구장에서는 아직 결판을 내지 못했다. 전쟁의 상흔은 지워져도 웸블리와 아즈테카, 그리고 기샤르에서 깊어져간 증오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 아르헨티나는 주장 라틴이 퇴장 당해 10명이 싸우는 악전고투 끝에 잉글랜드에 1-0으로 패한 후 '웸블리의 음모'라며 홈텃세를 비난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86년 멕시코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손으로 볼을 쳐 넣은 후 "신의 손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을 때의 분노를 아직도 삭이지 못한다. 아르헨티나가 2-1로 승리했지만 런던의 도박사들은 1-1 무승부에 베팅한 사람들을 당첨자로 인정했다. 그 순간만은 자존심이 돈보다 중요했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가 스웨덴·나이지리아와 함께 '죽음의 조'라는 F조에 편성됐을 때부터 두팀의 한판 대결은 2002년 최대의 이벤트로 꼽혔다. 조 편성이 끝나자마자 삿포로시 경찰 당국은 훌리건들을 상대할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경찰의 대(對)훌리건 전략 중심지는 삿포로시를 가로지르는 오도리공원.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축구팬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면 이곳에서 불씨가 지펴질 것이 분명했다. 아침 일찍부터 경찰이 방어 대형을 이룬 채 대기하고 있었다.

5.사자의 포효

주심의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흰바탕에 선홍색 십자가가 그려진 대형 잉글랜드기가 휘날리는 응원석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오언이, 폴 스콜스에게 볼을 밀어주고 아르헨티나 진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순간 아르헨티나 수비수들은 4년 전 보았던 오언의 무시무시한 스피드를 기억해냈다. 그 공포가 지나쳤을까. 오언의 발목을 묶으려던 디에고 시메오네가 해선 안될 파울을 저질렀다. 페널티 아크 오른쪽 지점이었다. 시간은 이제 겨우 1분이 지났을 뿐.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서둘러 벽을 쌓았다. 직접 골을 노릴 수 있는 거리와 각도. 베컴이 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베컴은 허를 찔렀다. 베컴이 발등으로 볼을 들어올려 벽을 넘긴 그곳에 오언이 있었다. 오언이 화살같은 스피드로 수비벽을 우회해 단숨에 아르헨티나 골키퍼 게르만 부르고스와 마주섰다. 볼이 지면에 닿기도 전에 오언의 몸이 허공에 떴다. 부르고스는 다이빙 한번 못한 채 경련하는 골네트만 바라보았다. 베론이 땅을 쳤다. 자신의 곁을 지나쳐가는 오언을 순간적으로 놓쳤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의 선제골은 경기의 흐름을 묘하게 바꿨다. 4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의지보다 리드를 지키겠다는 집념이 강해졌다. 그러자 제방을 두들기는 파도처럼 아르헨티나가 빠른 리듬으로 잉글랜드 수비벽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은 왼쪽 날개 클라우디오 로페스를 전반 35분 만에 불러내고 크레스포를 그 자리로 보낸 다음 스타팅 멤버에서 빠졌던 바티스투타를 최전방에 배치했다.

6.은하의 세계

잉글랜드는 잘 버텼다. 박진감 넘치는 몸싸움으로 아르헨티나 공격수들을 위험지역 밖으로 밀어냈다. 경기가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아르헨티나의 공격이 날카로움을 잃어갔다. 그러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방심한 잉글랜드 선수들의 심장 속에 한차례 섬광이 번득였다. 베론이었다. 잉글랜드 수비진의 횡패스를 가로채 35m짜리 장거리포를 작렬한 것이다. 잉글랜드 골키퍼 데이비드 시먼이 속절없이 허공에 떴다.

아아, 은하의 세계! 아르헨티나 관중석이 떠나갈 듯 했다. 어떻게 검색을 통과했는지 폭죽을 터뜨리는 관중도 있었다. 잉글랜드 응원석은 허탈감과 분노로 뒤덮였다. 환호하는 아르헨티나 관중을 향해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양팀 응원석을 갈라놓은 철제 펜스를 걷어차기도 했다. 펜스는 금방이라도 뜯겨 나갈 듯했다. 그 위로 물병이 날아다녔다. 오도리공원에 대기 중이던 경찰 지휘부에 훌리건 진압 병력 일부를 경기장으로 이동 배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어쩐 일일까. 대기심이 '잔여 시간 4분'을 알리면서 그라운드는 갑작스럽게 식어내렸다. 관중석 분위기와는 정반대였다. 이미 1승씩을 거둬놓고 있는 양팀은 더 이상의 소모전을 포기한 듯했다. 물론 경기를 끝장낼 기회가 온다면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글러브를 내린 채 동작을 멈추고 상대를 응시하는 두 복서처럼, 허점만 보이면 비수를 꽂을 각오가 돼 있었다. 주심이 자주 시계를 내려다봤다.

7.梅雨(매우)

센터 서클 부근에서 걸음이 엇갈렸을 때, 베컴이 은근슬쩍 베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베론이 베컴의 엉덩이를 툭 쳤다. 두 사나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전광판에 그들의 모습이 비치자 여성 관중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는 소린의 센터링이 잉글랜드 문전으로 날아드는 순간 함성에 묻혔다. 수비에 가담했던 에밀 헤스키가 다이빙 헤딩으로 코너킥을 만들었다. 베론이 주심의 눈치를 보며 다급하게 코너로 달려갔다.

삿포로돔 지붕을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두들기고 있었다.

허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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