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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한국 vs 미국 : 후반 막판 48년을 기다린 16강 골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코드명 '붉은 악마'

6월 9일.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휴일이었지만 청와대는 평소처럼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박지원 비서실장은 넥타이를 고쳐 매고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내일 미국과의 경기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의 16강 진출 여부가 판가름날 전망입니다. '붉은 악마' 작전도 지금까지는 순조롭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에 지면…. 정국 돌아가는 것도 그렇고, 지방선거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안경을 치켜올리는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알았네. 월드컵도, 선거도, 다 잘 돼야 할텐데…. 축구협회장이나 히딩크 감독에게 전화 한번 넣게. 당근을 내놓으려면 좀 화끈하게 내놔야 선수들이 신이 날 거 아닌가…."

"알겠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돌아나온 비서실장은 곧장 인터폰을 눌렀다.

"축구협회장 좀 연결해 줘. 그리고 선거대책본부도…."

#리스크를 줄여라

"이제 슬슬 빼야 하지 않을까. 너무 장밋빛 전망에 빠져 있다간 낭패를 볼 수 있어."

A증권사의 펀드매니저 장우진은 잘 다린 흰색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아직 서둘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을 이기고 16강 진출이 확정되면 주식시장이 강세를 보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장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역대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월드컵 경기가 끝난 뒤 주가가 오른 예가 거의 없어. 13일 지방선거도 변수가 될테고. 결과에 상관 없이 보유 물량을 좀 줄여서 리스크 관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일단 그렇게 가자구."

아침 회의를 끝내며 우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말야, 누구 14일 포르투갈전 표 좀 구할 수 없나. 도처에서 표 구해내라고 난리네 그려."

#D데이

월요일 아침이었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한국과 미국의 D조 예선 2차전을 맞아 대부분의 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자가용 승용차 2부제를 실시함에 따라 거리를 지나는 차량의 행렬도 눈에 띄게 줄었다. 마치 휴일같은 분위기였다. 회사원 김준호는 서둘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콩나물 시루를 방불케 하던 평소와는 달리 객차 안에 드문드문 빈 자리가 보였다.

'출근길이 매일 이 정도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준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한국, 16강 진출 오늘 결정짓는다','양(兩)정환-16강 우리가 쏘겠다','이기면 무조건 16강 진출, 지면 벼랑 끝으로'.

스포츠섹션의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설마, 오늘 같은 날, 일 가지고 닦달하지는 않겠지. 실적도 중요하지만 축구중계는 봐야 할 것 아냐. 그런데 어디서 보나'.

준호의 가슴은 셀레기 시작했다.

#We can do it!

"우리는 해낼 것이다. 평소대로 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절대 흥분하지 마라."(We can do it. I want you to play as usual. Don't get excited. Calm down.)

히딩크 감독은 숙소를 나서며 선수들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버스에 오르는 선수들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가득했다.

맏형 홍명보마저 상당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막내격인 이천수는 자신에 찬 쾌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대구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벌써 파도타기 응원이 벌어지는 등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반드시 미국을 꺾고 16강의 신화를 이루고야 말리라'.

라커룸에서 붉은색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주장 명보는 선수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그간의 고생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평소대로만 하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예전처럼 주눅들 이유도 없다. 자, 파이팅!"

선수들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함성의 도가니

전반 4분. 미국의 신예 랜던 도너번이 날카로운 슈팅을 날렸지만 공은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빗나갔다.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TV중계를 지켜보던 준호의 손에 땀이 맺혔다. 한국의 2-0 승리에 내기를 걸었지만 이기기만 한다면 스코어가 대수랴 싶었다.

히딩크 감독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경기 초반 선수들의 몸은 굳어 있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듯 했다.

이에 비해 미국 선수들의 몸놀림은 경쾌하기 그지 없었다. 경기 초반 다소 밀렸지만 10분이 지나면서 한국 팀에도 찬스가 왔다.

오른쪽을 파고들던 박지성이 날카로운 센터링을 날리자 뛰어들던 황선홍이 머리로 가볍게 공의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기대처럼 골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역시, 황선홍이야. 일단 미국 수비진을 흔들어 놓잖아."

중계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한 장면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 TV 앞에는 자리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축구에 별 관심이 없다던 여직원들도 이날만큼은 박수를 치며 한국팀을 응원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한국은 미드필드에서부터 상대를 압박하며 서서히 전세를 뒤바꾸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광석화같은 황선홍의 날카로운 슛이, 대포알같은 안정환의 중거리 슛이 잇따라 불을 뿜었다.

홍명보가 이끄는 수비진도 믿음직 했다. 플레이메이커 클라우디오 레이나가 간헐적으로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 넣었지만 골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준호는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이거야 원, 손에 땀이 나서 견딜 수가 있나. 날씨는 왜 이렇게 더워. 시원하게 골이라도 터지면 좋으련만…."

하프타임 동안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평상심을 유지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체력의 우위를 발판으로 미국 선수들의 체력이 저하되는 후반 20분 이후에 승부를 걸자고 주문했다. 라커룸을 나서는 선수들의 눈빛이 빛났다.

후반 14분, 안정환의 슛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순간, 다시 한번 관중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의 주도권은 완전히 한국으로 넘어왔다. 한국 선수들은 지칠 줄 모르는 야생마처럼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었다. 이에 비해 30대 노장 선수가 주축을 이룬 미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비수 카를로스 야모사와 제프 어구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진다 싶은 순간 갑자기 그라운드가 떠나갈 듯 우렁찬 함성이 터져나왔다.

"골~, 골~, 골~! 한국의 골입니다. 마침내 16강이, 16강이…."

아나운서의 격앙된 목소리는 곧 잠겨들었다. 환호와 감격이 스탠드에 물결쳤다. 준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동료들과 얼싸안고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쳐댔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럴 때 미국 애들이 쓰라고 만든 말이 있지. 알아? 오노(Oh, No!). 아폴로 안톤 오노!"

폭소가 터졌다.

#에필로그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구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11일 오전 각 증권사의 전광판은 대부분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월드컵 특수에다가 어제의 통쾌한 승리로 소비심리에 불이 붙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됐다는 분석이었다. 그러나 펀드매니저 장우진은 아침 회의 시간에 알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주가가 꽤 오르네. 글쎄, 누가 맞을지는 두고봐야 알지. 외국인 동향을 잘 체크해 봐."

같은 시간, 박 비서실장은 일찌감치 출근해 조간신문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꽤 많이 마셨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은 듯 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던 그는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아, 그러게 말이요. 축구가 효자지, 암 그렇구 말고. 여론조사 다시 해보고 결과 알려주세요." 그의 너털웃음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퍼졌다.

정제원 기자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중앙일보 축구기자들이 쓰는 '소설(小說) 월드컵'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조별예선 관심의 빅카드들을 골라 가상의 시나리오를 통해 경기 내용을 전망하고, 관련자 동향을 상상해보는 이 기획은 월드컵을 좀더 재미있게 즐겨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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