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구와 계급 : 19세기 英노동자들 축구로 恨 풀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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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축구는 하루 아침에 태어나 성장한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전세계적인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기까지 적어도 1백년 이상의 세월이 응축돼 있다. 그만큼 축구에 얽힌 사연도 가지가지다. 축구는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발전과정을 거쳤으며, 그 열광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사회·문화·국제정치학적인 함의는 무엇인가. 월드컵을 맞아 축구팬을 자부하는 사회학자들의 축구분석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1913년 4월 19일 12만명이 넘는 인파가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 구장으로 모여들었다.

애스톤 빌라와 선더랜드 사이의 FA컵 결승전 관람을 위해서였다. 이미 경기가 시작한 이후에도 경기장 주변은 미처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로 여전히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1872년 불과 2천여명의 관중을 모아 놓고 초라하게 첫번째 FA컵 결승전을 치른지 40여년 만의 일이었다.

흔히 축구의 종주국으로 영국을 꼽는다. 영국이 축구를 고안해 낸 것도, 축구의 역사가 가장 오래됐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축구는 세계 거의 모든 민족이 오래 전부터 즐겼던 민속경기의 하나였다.

중국의 고전 『수호지』에도 축구를 즐겼던 황제와 간신배의 얘기가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축구의 역사에서 영국이 했던 역할은 무엇일까. 영국은 지역마다 서로 달랐던 축구 경기의 규칙을 통일해 널리 전파한 나라였다.

1863년에 축구를 즐기던 귀족학교 출신의 엘리트들이 모여 규칙을 통일하고 축구협회를 설립한 것이 그 계기였다. 물론 이들이 만든 영국식 축구는 처음에 여러 형태의 축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 규칙에 따라 축구를 즐겼던 사람들도 귀족학교 출신의 엘리트들뿐이었다. 하지만 곧 축구는 일반 대중 속으로 급속히 확산했고,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선진국 영국의 위상 덕분에 세계인의 스포츠로 발전했다.

축구의 대중화 과정에서 1883년은 분수령을 이룬다. 이 해 FA컵 결승에서 노동자 계층의 선수로 구성된 프로팀 '블랙번 올림픽'이 사립학교 출신의 아마추어로 구성된 '올드 이토니안'을 2-1로 꺾고 축구의 주인이 노동자 계급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 때부터 축구는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스포츠가 아니었다.

축구를 즐기고 관람하는 사람들의 수는 해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출범 초기 여름 스포츠인 크리켓에 밀려 겨울에만 경기를 해야 했던 축구가 크리켓은 물론 그 사촌격인 럭비까지 따돌리고 영국의 국기이자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축구에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일까. 유서 깊은 민속경기로서 축구의 전통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다소 약화하기는 했지만 규칙 정비 이전에도 축구의 전통이 끊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진행된 두 과정이 함께 결합해 축구를 대표적인 대중 스포츠로 만들었다.

초기 축구체제를 정비했던 사회 지도층은 축구의 대중화에도 앞장섰다. 축구를 통해 하층계급의 무분별한 생활태도를 바로잡아보려는 목적에서였다.

학교 교사·종교 지도자·공장 경영자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상층 계급을 동경하던 중하층 계급은 엘리트들이 즐기던 축구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노력에 화답했다.

축구를 남성성(男性性)의 상징으로 보았던 사회적 인식도 축구의 인기를 부추겼다. 하층계급의 생활조건 변화가 매개체가 돼 주었다. 19세기 말 영국 사회는 본격적인 여가사회로 접어들었다. 토요일 근무시간이 축소되고 노동자들의 급여가 올라갔다. 돈과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대중은 다양한 여가활동으로 눈을 돌렸다.

축구는 해변 바캉스나 휴가여행을 비롯한 여러 여가활동 중 하나였다. 특히 중하층 노동자들이 축구에 열심이었다.

별다른 장비도 필요 없고, 참가 인원에도 구애를 받지 않으며, 도시의 공터 어디에서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노동자 대중은 '보는 축구'에도 열심이었다. 1880년대를 거치며 프로축구가 자리를 잡았다. 대중매체가 그 인기에 불을 지폈다. 대중매체는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경기 결과를 신속하게 전달해 지역 팀에 대한 응원열기를 부추겼다. 축구를 특정 계급만이 아니라 전 국민의 스포츠로 만든 것도 대중매체의 힘이었다.

또 전국을 잇는 철도망 덕분에 열성 팬들은 원정경기가 있는 먼 도시까지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지역 팀이 전국화하면서 축구의 인기도 전국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노동자 계급이 축구에 대해 느꼈던 매력이었다. 럭비와 크리켓 등 당시 축구와 경쟁하던 다른 스포츠들에 비해 축구가 지니고 있던 독특한 특성 말이다.

축구에서는 공수의 교체가 예측할 수 없이 빠르게 이뤄지고 긴 전진 패스가 허용된다. 절대적인 수세에 몰려 있던 팀이 한 번의 전진패스로 역습해 한 순간에 승리를 낚아 챌 수 있는 것이다. 기껏해야 두 세 골로 승부가 결정되는 경기에서 이런 특성은 축구의 의외성을 높이게 된다.

대중이 환호를 보냈던 것은 바로 이 의외성이었다. 명목상 현대사회는 계층상승의 길이 열려 있는 사회다. 하지만 평범한 하층계급 자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층상승을 이루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계층상승을 이룰 수 없다면 그 욕망을 충족시킬 대리 수단이라도 있어야 했다. 축구가 바로 그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영국식 축구의 특징인 긴 전진패스를 보며 그들은 쌓였던 응어리가 풀리는 후련함을 느꼈다.

노동자 계급이 축구를 받아들이면서 축구의 전술도 과거와 달라졌다. 개인기보다 패스를 중시하는 팀 플레이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또 반칙을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려는 경향 역시 강해졌다.이처럼 축구의 의외성에 매혹됐던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기호에 맞춰 축구를 변형시키기도 했다.

20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축구가 주로 노동자 계급의 스포츠로 인식됐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축구를 만든 것은 엘리트였지만 그것을 발전시킨 것은 노동자였다.

결국 축구의 인기 뒤에는 하층 계급의 생활을 교화(敎化)하려는 엘리트의 의도와, 고된 현실에서 탈출해 급작스러운 성공을 이루고 싶어하는 일반 대중의 욕망이 결합돼 있다.

축구가 세계화되고 계층과 무관하게 전 국민이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잡은 오늘날에도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대표되는 폭력적인 팬 문화가 유독 축구에서 그토록 강한 이유가 그것이다.

훌리건은 대리전장인 축구장을 실제 전장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대중의 욕망이 투사되는 한 축구장은 상징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언제까지나 전쟁터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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